기미년 3월 1일 토요일, 그날이 밝았다. 날씨는 따뜻하고 청명했다. 33인의 민족대표는 ‘먼 길’을 떠나는 채비를 했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하루 전인 2월 28일 종단을 이끌 후계자를 정한 유시문(諭示文)을 발표한 데 이어, 이른 새벽 천도교 청년들을 소집해 마지막 훈시를 했다.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種子)를 심으러 간다. 너희들은 3개 원칙(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을 끝까지 지켜라. 오늘의 동지가 내일 배신해 해를 끼칠 자도 있으니 매사를 성실히 참고 견뎌라. 우리 국권 회복에 대해서는 차후 세계 지도의 색채가 바꾸어질 때 각 열국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시킬 날이 올 것이다.…”(이병헌, ‘내가 본 3·1운동의 일단면·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기독교 감리파 대표 이필주(1869∼1942)도 덕수궁 옆 정동교회 사택에서 영문을 모르는 식구들을 위해 마지막 가족 예배를 올렸다. 서울 중앙교회 전도사인 김창준(1890∼1959) 역시 거사의 길을 나섰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되는 어린 아내와 노부모의 생계가 걱정됐지만 ‘가정보다는 조국’이라는 불타는 애국심이 먼저였다.(‘김창준 회고록’) 이들 민족대표는 가족이 일제의 보복을 당할까 봐 3·1운동 참여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3만5000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찍어낸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지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오늘의 거사가 반드시 성공하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이종일은 홀로 남겨질 어린 손녀(이장옥)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지만, 성사(聖師·손병희)가 전날 민족대표들과의 최종 회합에서 “가족 생활비로 1인당 매월 10원씩 지불할 것”이라고 약속한 말로 위안을 삼았다.(이종일의 일기 ‘묵암비망록’)
종로구 경운동에서 이종일이 기도를 올리던 그 시각, 인근 북촌 계동의 중앙학교 운동장은 바닥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여기저기 전단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일찌감치 등교하던 학생들은 한 장씩 주워보고는 아연 긴장했다.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는 독립선언서였다. 그때 교장 송진우가 숙직실에서 내려와 학생들이 서성대는 곳에 다가왔다. 전단 한 장을 주워 보더니만 빙그레 웃으면서 “너희들 공부 잘하라” 말하고는 의기양양하게 넓은 운동장을 횡단해서는 쏜살같이 사무실로 들어갔다.(이숙의 ‘죽사회고록’)
송진우는 독립선언서를 처음 보는 척 시치미를 뗐으나, 이숙 등 중앙학교 학생대표들은 독립운동에 깊숙이 개입한 ‘교장 선생님’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은 진작에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주익 등을 통해 경성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행동대 조직을 구축하도록 지도했다.(‘고하 송진우전기’, 현상윤의 ‘3·1운동 발발의 개요’) 학생조직은 후에 기독교 측 박희도, 이갑성 등이 가세해 중등학교 대표들까지 포함하는 조직으로 확대됐다. 거사 하루 전인 2월 28일, 학생대표들은 승동교회 예배당에서 최종적으로 독립선언서 살포, 거리 시위 등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3월 1일 새벽 경성에서는 중앙학교뿐 아니라 10여 개의 공·사립중학교와 네댓의 전문학교 등지에 격문(檄文)과 함께 독립선언서가 뿌려졌다. 시내 곳곳의 집집에도 배포됐다.
오전, 중앙학교 학생들은 평상시와 같이 수업을 했다. 상급생들은 오전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술렁거렸고, 영문을 모르는 하급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현상윤이 가르치는 수업시간. 그런데 현상윤은 수업 내용과 관계가 없는 제1차 세계대전, 파리평화회의 전망, 민족자결주의 등등의 얘기로 한 시간을 채웠다. 그는 수업을 마치면서 영어로 “굿 찬스, 굿 찬스(good chance·좋은 기회)”라고 하면서 의미심장한 힌트를 주었다.(이희승, ‘내가 겪은 3·1운동·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 팔각정과 태화관
독립운동의 ‘굿 찬스’ 시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독립선언서 배포와 군중 동원 행동대 역할을 한 학생대표들은 각기 맡은 반의 급장을 통해 탑동공원(탑골공원)으로 집결하도록 밀통했다. 낮 12시 정오를 알리는 남산의 오포(午砲) 소리가 집결 신호였다.
보안을 철저히 했던 때문일까, 경성 시내는 평소처럼 조용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이윽고 종로2가의 탑동공원은 꾸역꾸역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학생들로 삽시간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중앙학교는 상급생에서 하급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교가 텅 빈 바람에 이날로 예정된 졸업식은 취소됐다.
탑동공원의 팔각정을 중심으로 삼밭에 심 박히듯 학생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1897년 조성된 탑동공원은 이전부터 크고 작은 집회와 행사가 열린 곳이자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한민족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공간이기도 했다. 경기대 건축학과 안창모 교수에 의하면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에 건축된 팔각정은 고종 황제가 천자국(天子國)임을 선포하는 제사를 지낸 환구단의 황궁우를 쏙 빼닮도록 지은 구조물이었다. 또 대한제국의 군악대가 공원 서편에, 대한자강회를 잇는 대한협회가 공원 동편에 자리 잡은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1969년 3월 발행된 한국은행권 오십 원 지폐 앞면에 팔각정 모습이 그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탑동공원은 조선이 당당한 자주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선언의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오후 1시 30분경. 약속 시간이 다 돼 가는 데도 민족대표인 듯한 사람들은 탑동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그 시각, 민족대표들은 탑동공원에서 불과 300여 m 거리의 태화관(서울 인사동)에 모였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민족대표들이 일경(日警)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탑동공원의 흥분한 학생·군중과 경찰의 충돌을 우려해 장소를 변경한 때문이다. 민족대표들은 무엇보다도 ‘비폭력’을 중요시했다.
요릿집 태화관을 민족대표들의 회합 장소로 선택한 데도 까닭이 있었다. 장안의 명물인 조선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은 원래 조선왕조의 순화궁(順和宮) 터였고, 이후 이완용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집이었다. 1905년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늑약 밀의, 1907년 7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 1910년 강제 병탄 조약 준비 등 대한제국을 능멸하고 없애는 행위가 모두 이 집에서 벌어졌다. 바로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매국적인 모든 조약을 무효화한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신석호, ‘(개설) 3·1운동의 전개·3·1운동 70주년 기념논집’)
태화관 주인 안순환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 즉 궁중 연회의 최고 주방장을 지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사퇴한 그는 명월관과 태화관을 차린 배일(排日)사상가였다.(‘고하 송진우전기’)
태화관 산정별실(山亭別室)에 자리 잡은 민족대표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이종일이 인쇄해온 독립선언서 100여 장을 훑어보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등 기독교 측 대표 3인은 지방 행사에 갔다가 경성에 늦게 도착해 이날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병조는 상해로 건너가 불참한 대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고 2선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기로 한 함태영이 참석했다.
이때 독립선언서 제1순위에 기재된 손병희가 천도교 청년 이병헌을 불러 탑동공원으로 가서 학생들을 무마하도록 당부했다. 이병헌은 태화관에서 탑동공원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오더니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이 흥분한 나머지 태화관으로 달려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민족대표들이 요정에 앉아 있다는 말에 학생들이 격분했다는 것이다. 이윽고 강기덕(보성전문학교 대표), 김원벽(연희전문학교 대표) 등 학생대표 10여 명이 몰려왔다.
“선생님들, 무슨 일로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한다고 해놓으시고 이곳에 와계십니까. 우리는 선생님들이 오시기를 고대했는데 이렇게 되니 일이 낭패를 본 것이 아닙니까. 이 중요한 시기에 말입니다. 지금 공원에는 수천 명의 남녀학생과 온 장안의 시민이 기대에 찬 눈으로 선생님들의 선도를 바라고 있습니다. 속히 그리로 가셔서 민중시위 운동을 인도해 주십시오.”(‘묵암비망록’)
그러자 손병희와 최린은 젊은이들이 완력으로 소요를 일으킨다고 일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면서 간곡히 타일렀다. 물러난 학생대표들은 학생들대로 따로 거사를 추진키로 했다.
○ 10년 만에 등장한 태극기
오후 2시. 간략하지만 장엄한 행사가 시작됐다. 일제의 잔인한 무단통치 10년 만에 숨죽여 지내오던 한민족이 세계만방에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엄숙한 시간이었다.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남측의 정자(태화정) 동쪽 처마에 걸린 태극기를 향해 근엄한 자세로 경례했다. 역사적인 장소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내건 깃발이었다.
한용운이 신명을 바쳐 최후의 1인까지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하자는 취지로 인사말을 한 후, 민족대표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이미 일제의 정사복 경관과 헌병 수십 명이 태화관을 둘러싸고 있었다. 최린이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일본 경무총감부에 미리 알리도록 말해두었던 것이다. 이윽고 일경이 인력거를 가지고 와서 민족대표들을 체포해 가려고 했다. 그러나 최린 등 민족대표들은 태연자약한 자세로 이들의 무례함을 꾸짖고 자동차를 가지고 오라고 호령했다.
민족대표들이 서너 명씩 자동차에 분승해 남산 왜성대(현 예장동)의 경무총감부에 끌려갈 무렵, 탑동공원 중앙단상에도 1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태극기가 나타났다.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두 손으로 높이 들고 엄숙하면서도 떨리는 목청으로 읽어 내려갔다. 숨을 죽이고 듣던 학생들은 낭독이 끝나자마자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한국독립만세 등 만세 명칭도 여러 가지였다. 감격에 겨운 만세 소리는 마치 우는 소리인 듯했다. 남녀 구별 없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남학생들은 흥분해 “우와! 우와!”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고 모자를 공중으로 날렸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모자들로 인해 하늘이 까마귀 떼로 덮인 듯했다.
일경이 현장에 출동해 있었으나 이들을 막지 못했다. 태화관에서 붙잡혀가던 민족대표들도 군중의 만세 소리를 들었다. 나용환, 이갑성, 최린, 김창준 등은 체포돼 갈 때 자동차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수백 장씩 군중에게 던져 주었다. 거리에 있던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을 향해 목멘 소리로 더욱 만세를 크게 외쳤다. 민족대표들은 “우리의 목표는 달성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잡혀가지만 효과는 거둔 것이나 다름없다”고 기뻐해 마지않았다.(‘묵암비망록’)
팔각정 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독립운동본부의 전위부대로 내정된 학생들이 주도했다. 중앙학교 대표 중 한 명인 최현은 애장(愛杖·밤낮 들고 다니는 지팡이)을 높이 들고 공원 정문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전진했다. 그 뒤를 따라 학생들은 종로통으로 물밀듯이 빠져나갔다.(‘죽사회고록’)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자 시위 군중은 더욱 늘어났다. 3월 3일 고종황제의 인산(因山·국장)을 보러 상경한 군중까지 가세했다. 이들은 독립이 된 줄 알고 전부 길로 뛰어나왔다. 길은 흰옷 입은 사람들로 꽉 찼다. 앳돼 보이는 여학생들과 부엌 살림하는 아낙, 상투 꽂은 노인 등도 끼여 있었다.
서울서 가장 넓은 육조(六曹)거리(현 세종로)도 만세군중으로 뒤덮였다. 마침 그때 이 만세군중을 비집으며 일본인 경기도지사가 인력거를 타고 퇴근하다 경을 치르기도 했다. 군중들이 그에게 모자를 벗어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자, 도지사는 혼비백산해 고분고분 만세를 부르고 빠져나갔다.
이날 만세의 불길이 오른 것은 경성뿐만이 아니었다. 서북지역의 개성,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와 동북지역의 원산, 함흥 등에서 경성과 첫 거사를 같이했다. 3·1운동 현장에 있었던 유광렬(언론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3·1독립운동은 장엄 바로 그것이었다. 진지했던 그 모습, 혼연일체가 된 단결력, 그 어느 것 하나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감격적인 것이었다. 언제 다시 우리 민족이 그렇게 단결할 수 있을는지….”(‘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4년 3월 1일자)
:: 주요 등장인물 ::
이필주: 1869년 서울 출생. 22세 때 구(舊)한국군 군인으로 근무하다가 1903년 군복을 벗고 선교와 교육 사업에 종사함. 신학교를 졸업하고 정동교회 등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름. 출옥 후 수원 남양교회에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거하다가 1942년 병사.
이갑성: 1889년 대구 출생.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함.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 살포 등 중책을 맡음. 1924년 세브란스병원 의약 지배인을 거쳐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 광복 후 의회 의원, 광복회장 등을 역임함.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가 1981년 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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