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인명용 한자 가운데 옛날 같으면 이름에 쓰지 않았을 기상천외한 한자가 가득하다. 지금까지 내 눈을 거쳐 간 조선시대 사람 이름이 수만 개가 넘을 텐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글자가 한둘이 아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최근 전통 작명(作名)에 관한 연구 컬로퀴엄 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에 따르면 한자를 상용하는 일본의 인명용 한자는 2999자, 중국은 따로 제한이 없으나 대개 ‘통용규범한자표’에 수록된 8105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8142자로 오히려 더 많다.
원인은 여전히 성행하는 ‘작명법’ 탓이다. 이름에 쓰일 한자의 획수와 오행(五行)으로 운명의 길흉을 따지는데 당사자의 사주(四柱)까지 더하면 그 복잡함 탓에 막상 쓸 수 있는 글자가 몇 자 안 된다. 여러 작명법을 다 적용하면 아예 쓸 수 있는 글자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장 연구원은 “20세기 이전 우리나라에서는 획수를 따져 이름을 짓는 일이 없었고,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관념도 희박했다”며 “사주와 오행도 전통 작명 방식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조선시대 국왕의 작명 과정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다. 왕자가 태어나면 신하들이 이름 후보 세 가지를 담아 정명단자(定名單子)라는 것을 올리고 왕이 낙점했다. 중국 황제나 선대 임금의 이름과 겹치지 않는지, 역사 속 악인과 겹치지 않는지, 음과 뜻이 좋은지 등을 고려했다. 일례로 헌종의 정명단자에는 후보로 환(s), 희(熙), 광(炚) 등 3글자가 올라왔는데, 음과 더불어 ‘밝게 비추다’(明照) 등의 뜻만 쓰여 있다.
장 연구원은 “사대부 가문 역시 의미 있는 이름을 선호했다”며 “이름을 돌아보며 그 의미를 생각하는 고명사의(顧名思義)야말로 전통 작명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전통 작명’이라며 철학관과 작명소가 성행한다. 자녀 수가 적은 요즘, 부모들은 작명을 ‘전문가’로 불리는 이에게 맡겨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기도 한다. 작명법을 소개한 책들은 이런 심리를 이용해 특정 이름을 두고 “양(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었고, 오행에서 물과 불이 싸우고 있다. 일하다가 뇌출혈로 사망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식으로 마치 이름을 잘못 지으면 비명횡사할 것처럼 겁을 준다.
현대에 많이 사용하는 작명법은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시기 작명 수요가 늘어나면서 일본에서 유행하던 구마사키 겐오(熊崎健翁·1881∼1961)의 작명법이 도입된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그 영향은 작명법에 그대로 남아있다. 작명법에서는 “성의 획수에 태극수 1을 더해 삼재(三才) 중 천재(天才)가 구해진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1을 더하는 것’이 바로 일본식 작명법의 잔재다.
구마사키는 보통 한자로 4글자인 일본식 이름 가운데 잇단 두 자의 획수를 더하거나 네 글자 모두의 획수를 더한 수를 5격(格)이라며 따지는 방법을 창안했다. 일본의 성 두 글자의 획수를 더한 게 ‘천격(天格)’이다. 이 작명법은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4글자 이름을 짓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광복 후 한국식으로 3글자의 이름을 짓게 되자 천격을 구하는 데 성이 한 글자 모자랐다. 그러자 작명가들이 성의 획수에 1을 더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장 연구원은 “획수를 계산하는 작명은 모두 구마사키 이론의 아류에 불과하다”며 “이름은 뜻이 좋고 부르기 쉬우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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