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지돈 씨(35)는 지난달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다녀왔다.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의 한국관 작가로 선정돼서다. 소설가가 세계적인 건축전에 참여했다?
2일 만난 그에게 건축 관련 일은 단편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쓴 것뿐 아니냐고 짓궂게 묻자, “지난 1, 2년 동안 문예지보다 미술잡지의 원고 청탁을 받는 일이 많아지면서 미술계에 (이름이) 알려진 것 같다”고 차분하게 답했다. 이번 건축전에서 맡겨진 일도 여느 작가들과 같이 ‘창작’이었다. 정 씨는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을 소재로 단편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를 썼다. 이 작품은 한국관 벽면에 새겨진 텍스트로, 배경 사운드로 ‘전시됐다’.
미술에 대한 이해가 뜬금없는 건 아니다. 정 씨는 감독을 꿈꾸며 영화영상학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촬영 현장은 권위주의적이었고 마초적이었다.
“조폭이 등장해 극심한 강도의 폭력을 휘두른다든지, 비리를 밝혀내고 정의가 실현된다는 단선적 서사라든지… 한국영화가 지금껏 이런 내용이 주류인 것은 현장 분위기와도 연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판에 대한 짧지만 강렬한 비판은 그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책벌레였고 이야기 꾸며내는 걸 좋아했던 정 씨는 영화감독 대신 “혼자서, 목표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설가의 길을 택했다.
발표한 단편들이 책으로 나오기도 전부터 잇달아 문학상을 수상했고, 또래 작가들과 결성한 문학 집단 ‘후장사실주의’도 독특한 문학실험으로 관심을 모았다. 이 젊은 작가가 새로운 세기의 문학을 보는 시각이 궁금했다.
“문학이 삶의 진실을 포착하는 예술이라는 것, 인간성을 옹호하고 내밀하게 드러내는 최후의 보루라는 것… 그런 건 그냥 ‘아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에 대한 오랜 신념을 무너뜨리는 발언이 계속됐다. “문학의 전성기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 정도까지였을 텐데, ‘삶의 진실’ ‘인간성 옹호’ 같은 것은 그때 해냈던 일들이죠.” 그는 “현재의 문학엔 타인과 세계에 상처받은 사람의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투영돼 있다”면서 “그런 문학은 자기연민의 공동체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기성 문학의 틀을 바꾸고 싶다면서 “현재의 문학이 진실이라기보다 위로라는 걸 인정하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낯선 소설로 불리는 정 씨의 작품들엔 그런 변화의 의지가 담겼다. 허구의 이야기를 쓰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역사, 출전(出典) 등은 실제인 경우가 많다. 가령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나’는 소설 속 화자이지만 화자가 관심을 갖게 된 대한민국 마지막 황태손 건축가 이구의 이름을 접한 ‘한국현대건축의 유전자’(박길룡 지음)는 실제 저서인 게 그렇다. ‘픽션과 팩트’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바꾸고 싶다는 정 씨의 의도가 반영된 작업이다.
“팩트가 던져져도 인간에게 팩트 그대로 수용되는 건 아니다. 인간은 문화적 경험을 통해,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그 팩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픽션화한다.” 이렇듯 이 세계에 횡행하는 구별과 단절의 프레임을 바꿔보고 싶다는 게 새로운 세기 젊은 작가의 열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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