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 지난달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등 7곳이다. 이들 사찰은 1000년 넘는 역사를 이어오는 신앙·수도·생활 기능이 이어진 종합승원이자 각종 국보·보물이 가득한 문화유산의 보고다. 동아일보는 우리나라의 13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7곳 사찰의 아름다운 모습과 숨은 역사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1회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인 명법 스님과 함께 경남 양산시 통도사를 찾았다.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 문자 그대로 바람이 춤추고 서늘한 소나무가 반긴다. 장맛비가 오락가락 숲을 적신 9일. 경남 양산시 통도사 입구엔 수백 년 된 금강송 수천 그루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시끌벅적한 바깥세상과 단절되는 듯한 오묘한 기분을 선사한다.
길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통도사에 시주한 이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바위 조각들이 오른쪽에 쌓여 있다. 자세히 보면 여성 이름이 많다. 일제강점기 당시 부산 지역 기생들이 시주를 많이 했기 때문이란다. 답답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들의 염원은 얼마나 통했을까.
역사책에 등장하는 유명인사도 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1745~?)와 그의 스승인 김응환(金應煥)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찬찬히 이들의 이름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숲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사찰의 세계에 들어간다. 일주문을 건너 사천왕문 사이로 대웅전을 비롯한 사찰 전각과 통도사를 감싸고 있는 영축산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 속이지만 비교적 평탄한 지대라 평면 가람배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 기법이자 자연의 풍경을 빌려 쓴다는 ‘차경(借景)’ 통도사는 조경의 매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통도사는 크게 상·중·하 노전으로 나뉜다. 646년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뒤 고려와 조선시대에 지속적으로 중건·중수되면서 규모가 계속해서 커졌기 때문이다.
동서로 이어지는 이동 축을 따라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은 하노전. 가운데에 위치한 극락보전의 한쪽 벽에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수십 명의 승려와 백성이 배를 타고 극락세계로 떠나는 모습을 담았다. 자세히 보면, 뱃사람 가운데 한 명만 뒤를 돌아보고 있다. 속세에 미련이 남아 이승을 바라보는 것. 눈을 크게 뜨고, 사찰이 지닌 ‘숨은 코드’를 찾아보는 즐거움을 누려보자.
하노전의 오른편에 위치한 중심 전각인 영산전(보물 제1826호)에는 석가모니 일생을 8장면으로 나눠 그린 팔상도(보물 제1041호)가 있다. 조선 후기 통도사 소속 화승들이 직접 그렸다. 통도사는 팔상도를 비롯해 전통 불교회화 작품만 6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을 만큼 불교 예술 자료가 풍부하다. 명법 스님은 “통도사에는 예부터 화승들이 계보를 이을 만큼 수행과 신앙 뿐 아니라 문화·예술의 가치를 중시했던 사찰”이라고 설명했다.
본당에 들어서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면 사찰의 가운데 공간인 중노전이 등장한다. 중노전의 중심 전각인 대광명전(보물 제1827호)에는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비로자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앞쪽 용화전 앞뜰에는 밥그릇 모양의 봉발탑(보물 제471호)이 있는데, 석가모니가 미래의 부처인 미륵을 위해 준비한 공양을 뜻한다. 미륵과 화엄 사상 등 한국 불교의 변천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중노전의 특징은 스님들이 실제 수행을 하는 공간인 ‘원통방(圓通房)’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 매일 새벽 통도사 스님들이 다같이 발우공양을 드리고, 경전 공부 등을 진행한다. 내부로 들어가 보면 사찰의 가장 큰 어른인 방장(方丈) 스님부터 막내 스님의 자리까지 벽면에 스님들의 위치가 표시돼 있다. 입구 근처에는 독특하게도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 있다. 스님들의 찬상(반찬 그릇)을 옮기는데 쓰인다.
명법 스님은 “일본의 산사들은 외형적 전통은 유지하고 있지만 승려들이 출퇴근을 하면서 생활 기능을 잃었고, 중국은 문화대혁명 등 굴곡진 현대사를 거치면서 전통 불교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다”며 “통도사는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통적인 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불교의 살아있는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상노전으로 가면 통도사 대표 문화재인 대웅전과 금강계단(국보 제290호)을 만날 수 있다. 통도사 대웅전에는 다른 사찰과 달리 불상이 없다.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 놓은 금강계단을 바라볼 수 있게 한 쪽 벽면을 뚫어놨기 때문이다.
사각형 2중 기단으로 구성된 금강계단은 소나무 숲과 대웅전에 둘러싸여 아늑한 기분을 들게 한다. 볼록한 종 모양으로, 고대 인도의 부도와 같은 모습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통도사 입구에는 고승들의 부도를 모아놓은 부도전이 있다. 금강계단의 모습을 빌려 종을 형상화한 부도가 많은 게 특징이다.
대웅전 뒤편도 빼놓으면 아쉽다. 통도사 창건 설화가 깃든 연못인 ‘구룡지(九龍池)’가 나온다. 자장율사가 연못 속에 살던 용 9마리를 내쫓고, 한 마리만 남긴 채 연못을 메워 통도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지금 연못에 가들 용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물위로 비친 대웅전 처마 끝이 이동하는 이의 시선을 따라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신기하다.
상노전 가장 안쪽에는 참선을 수행하는 선원들이 모여 있는 ‘보광전’이 있다. “생각하기 어려운 경지를 볼 수 있다”는 뜻의 ‘능견난사문(能見難思門)’ 안쪽에 위치한다. 오직 선(禪)을 위해 정진하는 스님들만이 머무르는 공간이다. 어렴풋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스님들의 심정이 그려진다.
잠깐 발걸음과 숨소리를 멈췄다. 소나무 숲에선 딱따구리가 ‘똑똑똑’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정각마다 수행을 알리는 목탁소리도 함께 퍼져나갔다. 자연과 문화유산, 살아있는 신앙의 어울림을 한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곳. 세계 유산의 품격을 지닌 통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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