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은 로맨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갑자기 우산 안으로 뛰어 들어온 한 여인. 그녀를 보자마자 운명을 직감한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운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랑을 그려낸 창작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는 2001년 개봉한 동명 영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2012년 초연 때부터 웰메이드 창작뮤지컬로 호평을 받았고 재연(2013년)을 거친 뒤 5년 만에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극의 전개는 원작 영화의 흐름과 거의 비슷하다. 인우는 대학 시절 우연히 만난 태희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첫사랑의 아픔을 가슴에 묻은 인우. 17년 뒤 국어교사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다 제자 현빈이 태희의 환생임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기존 스토리텔링은 그대로 유지했지만 이번 공연은 변화한 시대에 맞춰서 성차별이나 소수집단 비하로 읽힐 위험이 있는 대본과 가사 일부를 수정했다. 그래선지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으며 나오는 격한 대사들도 운명적 사랑을 가로막는 현실적 제약에 대한 고뇌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오가는 설정을 위해 무대의 깊이와 조명을 다양하게 활용한 점이 매력적이다.
특히 태희의 교통사고 장면은 특별한 장치 없이 객석 전체를 비추는 강렬한 붉은 조명만으로 관객의 감정이입을 배가시켰다. 덕분에 그 장면 직후 자신이 태희의 환생임을 깨닫게 되는 현빈의 감정선 역시 잘 살아난다. 17년 만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재회한 두 사람이 손을 맞잡는 장면은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 잔잔히 흘러가던 극의 정점을 이룬다.
물론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구성과 여백을 넉넉히 둔 무대는 때때로 단조로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 아쉬움은 감미롭고 강렬한 넘버들이 채워준다. 2012년 한국뮤지컬 대상 음악상과 2013년 더뮤지컬어워즈 작곡·작사상을 수상했던 서정적인 노래는 명불허전이다.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이 흠 잡을 데 없이 소화해내는 탄탄하고 아름다운 노래가 아련한 첫사랑의 감성을 되살린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울컥하고, 다 아는 감정인데도 또 흔들리며 시큰해진다. 첫사랑이야말로 모두에게 그런 존재 아닐까. 종일 습한 비가 내리는 이 여름에 무척 잘 어울린다. 8월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6만6000∼8만8000원. ★★★(★ 5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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