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형님네와 일본으로 온천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시부모님은 저와 남편을 볼 때마다 그때 얘기를 하십니다. ‘올해는 너희가 우리를 해외에 데려갈 차례’라고 은근히 압박하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없는 살림에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가시고 아들 둘 번듯하게 키워내신 시부모님…. 저도 마음 같아선 해외는 물론이고 우주여행이라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다녀오시면 안 될까요? 꼭 아들 내외와 함께 가야 하는 건가요?
재작년 처음으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태국을 다녀왔는데, 기억에 남는 추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음식이 짜다, 다리가 아프다, 밖에선 덥다, 실내에선 에어컨 때문에 춥다…. 어머님 불평만 듣다가 3박 4일이 끝났으니까요.
1년에 한 번 가기 힘든 해외여행을 또 그렇게 다녀와야 하는 걸까요? 그런 휴가보다는 차라리 출근하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드는 건 막심한 불효겠죠. ㅜ.ㅜ
■ 여행지-음식, ‘꼭 함께’ 버리고 서로 취향 존중을
많은 직장인들이 불볕더위에도 마음 한구석 시원함을 느끼는 건 곧 있을 휴가 때문일 것이다. 직장인의 ‘오아시스’, 즐거운 휴가를 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풍경 좋고 맛있는 음식 있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 으뜸이다. 지난 한 해 2650만 명의 한국인이 외국을 다녀왔다. 이 중 약 500만 명이 휴가철인 7, 8월에 출국했다. 5년 전과 비교하면 한 해 해외여행자 수는 두 배 이상으로 많아졌다.
덩달아 여행을 둘러싼 가족 내 갈등도 커지고 있다. 특히 부모와 자식이 동행하는 ‘다(多)세대 여행’에서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여행은 가족의 화합을 다질 좋은 기회이지만, 자칫하면 가족 간 의만 상하는 ‘최악의 여행’이 될 수 있다.
박모 씨(35)는 올 여름휴가가 벌써 두렵다. 여름휴가지는 이미 장인이 동해로 결정했다. 처남이 동반한다는 점도 일방적으로 통보됐다. 박 씨는 “장인, 장모, 처남, 아내, 그리고 저까지 다섯 식구 중 돈을 버는 건 저 혼자”라며 “결국 제가 번 돈으로 가족 여행을 가면서 왜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더욱이 지난해 가족 여행은 쓰디쓴 기억으로 남아있다. “고맙다는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어요. 그저 저는 짐꾼이자 운전사일 뿐이에요.”
가족 여행은 언제 갈등이 터져 나올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6월 초 시부모와 동남아를 다녀온 최모 씨(29·여)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시어머니는 애써 찾은 현지 맛집에서 “느끼하다. 김치 좀 달라고 해라”라고 하는가 하면, 자신의 비키니 수영복을 두고는 “결혼한 애가 어떻게 이런 걸 입니?”라며 핀잔을 늘어놓는 통에 현지에서 온몸을 가리기 위해 래시가드를 새로 구입해야 했다.
부모도 자식과 함께하는 여행이 즐겁지만은 않다. 올해 봄 세 살배기 아들이 있는 딸 부부와 제주도를 다녀온 양모 씨(65)는 자신을 ‘육아 도우미’ 취급하는 딸에게 서운함이 컸다. “저녁을 먹은 후 딸 내외가 ‘잠시만 아이를 봐 달라’고 하고는 나가더니 리조트의 바에서 3시간 가까이 둘이 술을 마시고 오더라고요.” 그는 다시는 딸 내외와 여행을 가지 않을 생각이다.
전문가들은 ‘가족은 당연히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이라는 인식과 여행을 가서도 일상 속의 ‘가족 역할’을 요구하는 행태가 이런 갈등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동반자의 체력이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일정을 강요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즐기려는 생각 없이 불평, 불만만 늘어놓는 태도도 가족 여행을 망치는 주범이다.
여행지나 음식 등에 대한 취향을 맞출 수 없다면 ‘꼭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편이 낫다. 여행은 시간과 돈, 체력을 모두 평소보다 많이 소진하면서 즐거움을 찾는 놀이다. 취향을 맞추기 힘든 동반자는 서로의 즐거움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며 동유럽 여행 가이드 일을 하는 권수진 씨는 “가족 단위 여행객을 안내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일행 중 누군가가 원하지 않는 장소에 온 듯 지루해하거나 불쾌한 표정을 지을 때”라며 “호프부르크 왕궁 같은 명소도 누군가에겐 감동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별 볼일 없는 서양식 건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각자의 기호에 맞는 여행을 따로 가거나, 같이 가더라도 짧은 시간이나마 서로 다른 코스를 짜는 게 좋다”고 강조했다.
함께 여행을 가기로 정했다면 적어도 4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여행 계획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협의하고 △음식이나 문화가 낯설더라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다른 가족에게 많이 힘들 수 있는 일정은 과감히 포기하고 △여행을 함께 온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육아나 각종 잡일을 합리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오승환 하나투어 대리는 “서로의 취향을 파악해 일정을 짜고, 모두가 일상에서 벗어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역할을 나누고 서로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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