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를 낳은 것은 2012년. 넷째를 품고 있는 지금과 불과 6년 차인데도 그 사이 임신부를 대하는 인심이 많이 각박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 서울에서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을 타면 양보 받는 일이 거의 없다. 첫째를 가졌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가 봐도 확연히 배가 나온 만삭 임신부에게 선뜻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열에 한두 명 수준이다.
물론 ‘나는 임신부니 당연히 자리를 양보 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양보는 어디까지나 배려지 의무가 아님을 안다. 나도 얼마 전까지 임신부처럼 안 보이도록 펑퍼짐한 옷을 입거나 지하철에서는 문 앞에 서 있는 식으로 불편한 상황을 피했다. 양보를 강요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그 정도 서 있을 체력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삭에 들어서면서 대중교통 안에서 서 있는 게 버거울 때가 많다. 더구나 누가 봐도 임신부인 게 테가 나면서 남들의 시선도 불편해졌다. ‘누군가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데….’ 다들 말은 안 해도 나를 그런 시선으로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계속 신경 쓰이는 대상이 되느니 누가 자리를 양보해 얼른 앉았으면 싶다.
그런데 불행히도 양보를 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얼마 전 지방 출장을 다녀와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삼복더위에 기차역을 나와 택시정류장까지 걷느니 바로 연결된 지하철을 타는 편이 나아보였다. 퇴근시간을 약간 지나 지하철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분명 나를 다 보았을 텐데, 바로 앞에 앉은 두 청년을 비롯해 누구 하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솔직히 힘든 것을 떠나 조금 놀랐다. 특히 앞에 앉은 두 청년은 직장 선후배 사이인 듯했는데 내 배를 한 번 흘낏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본인들 사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연애는 해?” “아니, 아직 만나는 사람 없어.”
남편에게 이 ‘놀라운 경험’을 이야기했더니 의외로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요새는 어르신들에게도 양보 잘 안 해. 다들 본인 삶이 힘들거든. 더구나 남들 도와봐야 득 될 게 없고 오히려 도우려다 해를 당했다는 뉴스도 많이 나오잖아.”
나도 직업이 직업인만큼 늘 흉흉한 소식을 들으며 살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람들의 팍팍한 삶이 이토록 인심을 삭게 하는가 싶어 새삼 놀라웠다.
생각해보면 임신부에 대한 인심만 사라지는 건 아닌 거 같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쇼핑몰이나 실내 놀이시설로 놀러 가면 사람들 사이에 배려가 많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쇼핑몰 입구는 보통 크고 무거운 유리문이다. 내가 낑낑대며 문을 열고 2인용 유모차를 밀어 넣는 동안 도와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은 뒤에 유모차가 따라 들어오는 것을 빤히 보면서 오히려 문을 그대로 놓고 가버려 유모차가 문에 치일 뻔한 적도 있다.
유모차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새치기를 당한 적도 여러 번이다. 조금만 걸으면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가 있는데도 굳이 ‘유모차 우선’이라고 써 있는 엘리베이터를 비집고 들어와 타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물론 그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바쁜 일정과 사정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러 이동 방법이 있는 그들과 달리 유모차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밖에 없다. 한 번 새치기를 당한 뒤 10여 분을 기다리다가 결국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해 급한 나머지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유모차를 들쳐 업고 남은 손으로 아이들을 줄줄이 잡으니 마치 피난민 같았다.
씁쓸한 것은 엄마들 카페에 가보면 이런 경험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점이다. 엊그제에도 자주 가는 맘(mom)카페에 한 다자녀 가정의 이야기가 올라왔다. ‘다자녀 엄마인데 아이들을 여럿 데리고 택시를 타려 하자 택시기사가 대놓고 핀잔을 줬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예전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애들과 가까운 쇼핑몰에 가려고 택시를 잡는데 5분여 동안 빈차 3대가 그냥 지나쳐갔다. 누가 봐도 먼 거리를 갈 모양새가 아니고, 애들 여럿은 물론이고 유모차까지 실어야 하는 품새를 보고 차를 세우지 않는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애들을 멀찌감치 세워놓고 혼자 택시를 잡자 금세 한 대가 와서 섰다.
“이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데 옆 건물로 가면 지하 주차장으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유모차를 태울 수 있을 거예요.” 어제 지방의 한 과학관으로 가족나들이를 갔다가 한 아주머니께서 베푼 ‘작은 배려’다. 내가 먼저 묻지 않았는데, 유모차를 끌고 온 것을 보고 선뜻 먼저 다가와 말씀해주셨다. 이분의 한 마디가 없었다면 더운 날 아이들과 유모차까지 들쳐 메고 낑낑거리며 계단으로 내려갈 뻔했다.
별 것 아니지만 받는 입장에서 그런 배려는 큰 힘이 된다. 누군가는 ‘오지랖’이라고 비아냥댈지 모르지만, 내 아이들만큼은 꼭 그런 배려를 상시 실천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배려란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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