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찾은 충남 공주시 마곡사는 태화산 자락의 마곡천이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사찰 입구에서 볼 수 있는 해탈문(금강문)과 천왕문이 일렬로 서 있지 않고, 30도가량 꺾여 있었다. 굽어진 하천 지형에 순응하기 위한 겸손한 가람배치다. 극락교를 지나 산사 경내로 진입하면 왼편에 백범 김구(1876∼1949)가 머물렀던 ‘백범당’이 나온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백범일지 중에서)
1898년 백범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를 죽인 혐의로 인천형무소에 투옥된다. 이내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마곡사로 숨어들었다. 이곳에서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1년간 지내며 재개를 도모했다. 광복 이후인 1946년, 백범이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마곡사를 다시 찾아와 심은 향나무는 지금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마곡사 뒤편으로 200여 m를 걸어가면 백범이 머리를 깎은 장소인 ‘삭발바위’가 나타난다.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마곡천을 따라 ‘백범 명상길’이 조성돼 있다.
백범당 옆에는 사찰의 주법당인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있다. 대광보전에는 건물 내외부 벽면 전체에 불화가 새겨져 있어 마치 미술관에 온 듯하다. 내부의 비로자나 불상 뒤편에는 3m가 넘는 거대한 수월백의관음보살도가 그려져 있다.
이처럼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배경에는 ‘우리나라 화승(畵僧) 배출의 산실’이라는 마곡사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경기 남양주시의 흥국사(경산화소), 금강산의 유점사(북방화소)와 함께 남방화소로 불리며 우리나라 3대 화소(畵所)사찰로 꼽힌다. 조선 후기의 보응, 문성 스님부터 근대 불교미술의 선구자 일섭 스님 등 당대 최고로 평가받는 화승들이 모두 마곡사 출신이다. 화승의 명맥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불화장 중요무형문화재(제118호)인 석정 스님 역시 마곡사 화승으로 활동했다.
이날 동행한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화승의 미술 교육은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하다”며 “밑그림을 따라 1000번, 옆에 놓고 그리기를 1000번, 보지 않고 1000번을 그리는 등 한 그림마다 3000번의 연습을 거칠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산사 중에서도 문화예술의 향기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 마곡사”라고 설명했다. 마곡사는 남방화소의 명맥을 잇고, 전통 불교미술 보존을 위한 교육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림뿐 아니라 빼어난 글씨도 함께 즐길 수 있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최고의 명필로 이름을 날린 해강 김규진(1868∼1933)이 마곡사 현판을 썼고, 대광보전이라는 글씨는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작품이다. 정조 때 문신이었던 송하 조윤형(1725∼1799)이 남긴 심검당 현판도 남아 있다.
대광보전 오른편의 고구려식 창고인 ‘고방’은 여전히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나무의 원형을 살린 이색적인 사다리와 습기 제거를 위해 외부로 개방된 1층 구조 등 우리나라 전통의 생활유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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