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일인의 삶/브룬힐데 폼젤 지음·토레 D 한젠 엮음·박종대 옮김/328쪽·1만5000원·열린책들
1911년 베를린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성이 있다. 매질도 잦았던 엄격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순종을 배웠다”고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은 그에게 부와 출세에 대한 열망을 심어줬다.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정치에 무관심했다. 나치가 정권을 잡았던 1933년 총선. 그는 독일 국가인민당의 깃발이 멋있다는 이유로 표를 던졌다. 오전에는 유대인 보험회사에서, 오후에는 나치 당원 밑에서 일하는 이중생활(?)도 서슴지 않았다.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됐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치 권력의 중심부로 자리를 옮겼다.
1942년부터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여비서로 일했던 브룬힐데 폼젤 이야기다. 그는 지난해 1월 10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 져야 할 책임도 없죠. 혹시 나치가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일 민족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도, 그건 우리 모두가 그랬어요.”
다큐멘터리 영화 ‘어느 독일인의 삶’(2016년)에서 그의 항변은 일관되고 단순하다. 자신을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평범하고 무지하며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나치의 만행을 인정하면서도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을 독가스로 죽인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는 몸담았던 나치를 위해 통계를 부풀리거나 괴벨스의 발언을 타이핑하는 등 “별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하면서도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웠다”고 회고한다. 전쟁 막바지에도 도망을 택하지 않았다. 지하 벙커에서 손수 독일의 항복 깃발을 만들면서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맡은 일을 어떻게든 잘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되고 이기적인 건가요? 그게 설사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는 걸 알았더라도 말이에요.”
악행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는 해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도 떠오른다. 그에게 과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이 책을 통해 폼젤의 증언을 정리한 정치학자 토레 D 한젠은 “그는 비난받을 점이 많다”고 일갈한다. “나치의 악행을 알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젠의 말대로, 나치의 최종 목표에 무관심하면서도 맹목적으로 지지했던 ‘외면’이라는 키워드가 독일 국민에게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역사는 다르게 흘러갔다”는 게 한젠의 지적이다.
이 책은 나치 부역자의 변명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치가 적지 않다. 살기 힘들어질수록 극단이 판친다고 했던가.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 프랑스 마린 르펜과 네덜란드 헤이르트 빌더르스 등 극우 지도자의 선전(善戰)을 목도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같은 독재자도 빼놓을 수 없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들의 부상에서 나치 독일의 징후가 엿보인다. 나치는 민족의 부흥을 약속했고 전쟁 패배와 경제난으로 고통받던 독일 국민은 이에 화답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무지, 무관심은 곧 ‘죄’다. 한젠은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사라질 때 민주주의가 말살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당신은 혹시 또 다른 브룬힐데 폼젤이 아닌가. 그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