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란 언제나 도전입니다. 우린 아버지처럼 되고자 하는 동시에, 그의 통제와 압박에서 벗어나 그를 뛰어 넘고 싶어 하죠.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게 됩니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66)이 최신작 ‘빨강머리 여인’의 국내 출간(6월)을 맞아 동아일보와 인터뷰에 응했다. 10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스카이프로 40분 넘게 영상통화에 나선 그는 “아버지(Father)와 운명(Fate)은 대단히 중요하며 서로 관련이 있다”며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다. ‘빨강머리 여인’은 오이디푸스 신화와 페르시아 고전 ‘왕서’의 부자(父子)관계를 모티브로 한 현대극이다.
“이번 소설은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부모의 길을 따르기보단 자기 자신만의 길을 가죠. 많은 돈을 벌면서 행복한 삶을 즐기고 싶어 하고요. 과거엔 가족에 의해 운명이 결정됐지만 현대 사회는 더 개인적입니다. 이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서양신화와 달리 ‘왕서’에서 아들 쉬흐랍은 아버지 뤼스템에게 죽임을 당한다. 다양한 옛 고전을 소설로 재창조하는 작업을 해온 파묵은 20년 전 ‘내 이름은 빨강’ 집필 당시 쉬흐랍 이야기를 접했다고 한다. 이번 작품이 이전 작품보다 읽기 쉽다고 평하자 “정확히 봤다!”며 맞장구를 쳤다.
“더 단순하고, 짧은 문장이죠. 문학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즐길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세계 60여 개국의 지적이고 인내심이 많은 독자들조차도 ‘당신의 소설은 어렵다’고 했었거든요, 하하. 언제나요.”
전작 ‘검은 책’ ‘하얀 성’ ‘내 이름은 빨강’처럼 이번 작품 역시 제목에 색깔이 들어있다. 파묵은 이에 대해 “이슬람 신비주의 같은 상징적 의미는 전혀 없다. 다만 어린 시절 화가가 되고자 미술 교육을 받았던지라 색깔은 보이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소설만큼은 다른 얘길 들려줄 수 있을 것 같군요. 세계 문학에서뿐 아니라 터키에서조차 빨강 머리를 지닌 여성은 분노에 차 있거나 제멋대로이며 성적으로 개방적일 거란 고정관념이 있어요. 많은 터키 여성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염색을 통해 머리색을 ‘선택’합니다. 이 점이 흥미로웠어요. 그들은 남성이 만든 룰에 동의하지 않고 저항하는 거죠. 이슬람 사회가 여성에게 억압적인 건 명백합니다. 하지만 그걸 이곳 여성은 수동적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져선 안돼요. 많은 여성이 편견에 맞서 싸우고 있어요. 저는 이런 얘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그는 최근 터키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는 국제사회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으며 죄 없는 이들을 감옥에 보내고 있다. 정말 화가 난다”고 했다. 현실을 지켜보기 괴로워 일에만 몰두하며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단다.
“저는 이스탄불을 사랑합니다. 간혹 이스탄불에 왜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묻는데, 65년 동안 살아온 이 도시는 가족과 같아요. 가끔은 화도 나고, 그래도 꼭 돌아오고 싶고, 안정감과 소속감도 주는 곳이죠.”
다음 달 교수로 재직하는 컬럼비아대학교 개강을 맞아 미국으로 건너갈 계획인 파묵은 현재 ‘흑사병’과 관련한 1900년대 배경의 신작을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글쓰기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전~부!(everything)”라며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보였다.
“저는 책을 통해 읽고 쓰는 법을 배웠어요. 모든 위대한 소설엔 저자의 ‘가치 우선순위’가 들어 있어요.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죠, 이것이 제가 소설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자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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