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명문대를 졸업한 ‘루이스’는 음식점이나 술집에 가면 종업원을 가능한 한 배려한다. 새벽에 일하는 종업원을 보면 접시라도 대신 닦아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자신이 취업할 때쯤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일어났고, 혹독하게 일을 시키는 음식 체인점에 간신히 취업했다가 고생했던 기억 때문이다.
‘리카’도 그렇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조상 무덤에 성묘하러 갔다가 “나중에 함께 묻히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날아오를 것처럼 기뻐했다. ‘마유’는 고교 시절 주변 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절친’을 질투했던 기억이 있다. ‘요시노’는 아이 셋을 키우면서 이혼한 전남편이 자신 명의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낮에 파트타이머로 일한다. ‘니시나리’는 조선소 직공, 막노동꾼, 배달, 용접공, 경비원을 비롯해 안 해본 일이 없다.
각자 다소 ‘특이한’ 점도 없지는 않다. 루이스는 일본계 남미인으로 청소년기에 부모를 따라 일본에 온 동성애자다. 마유는 음식을 씹기만 하고 뱉는 섭식 장애를 겪었다. 리카는 트랜스젠더로 바에서 쇼를 한다. 요시노는 밤에는 출장 마사지사로 일하며 성매매를 한다. 니시나리는 공원에 텐트를 치고 노숙을 오래 했다.
일본의 사회학자와 그 제자인 대학원생들이 이들을 인터뷰한 내용이 책에 담겼다. 정확히는 인터뷰한 내용‘만’ 담겼다. 저자는 특정한 이론적 틀로 이들의 삶을 섣불리 재단하고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니시나리의 삶을 망가뜨린 주요인은 도박과 사채”라는 식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다만 화자가 더 말할 수 있도록 대화를 이어 나간다. 책은 독자가 마치 만화 ‘심야식당’의 한구석 자리에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인터뷰 내용이 푸념 같은 개인적 맥락에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니시나리가 생활보호 제도를 ‘복지 맨션’(일본에서 전문가나 자원봉사자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지역 사회의 맨션)에 와서야 처음 알았다는 것, 이후 맨션은 대형화됐지만 오히려 커뮤니티는 무너졌다는 것, 소비자금융이 너무 쉽게 돈을 빌려준다는 것 등 제도적 문제 역시 화자의 말 속에서 자연스레 그 편린을 드러낸다.
소수자의 삶에 대한 호기심 내지 동정이 책을 펼치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책 속의 그들은 리카의 말처럼 “쓸쓸하지만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강하게 살아온 이들”이다. 요시노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이런 일도 하고 있는 거죠”라고 했다. 오롯이 담긴 소수자의 목소리가 편견을 조금씩 무너뜨린다.
“보통 사람들도 섹스 측면에서 특별한 버릇이 있기도 하잖아. …스트레이트한 사람(이성애자)들은 우리와 분리되고 싶어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도긴개긴’이야. 그렇지 않아?”(리카)
일본 리쓰메이칸대 교수인 저자는 오키나와 사람의 노동력 이동과 정체성, ‘부라쿠민(部落民)’이라고 불리는 하층민에 대한 차별 등을 연구했다. 2016년 낸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국내에도 번역 출간돼 꽤 화제를 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출간 순서가 바뀌었지만 일본에서는 ‘거리의 인생’이 이보다 앞선 2014년에 나왔다.
“우리가 공상으로 그려 내는 세계보다 감추어진 현실이 훨씬 더 심오하다.”(야나기다 구니오의 ‘산의 인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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