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 개관전
쿤스-허스트-김호득-이배 등 국내외 거장 4인 작품 1점씩 전시
참으로 오묘한 전시다. 알아먹기 쉬운 듯한데, 쉽사리 잡히지 않는.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 여우에게 홀린 기분이 이럴까. 분명히 손에 쥐었던 공이 ‘뿅’ 하고 사라졌다.
17일 개관한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의 예술 전시 공간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 개막 특별전은 첫인상은 무척 화려한데도 담박했다. 패션디자이너 정구호가 디렉터를 맡아 맞춤한 듯 미니멀한 분위기가 물씬했다. 1346m²(408평) 규모의 개관기념전은 국내외 작가 4명의 작품 4점. ‘無節制&節制(무절제&절제)’란 전시 제목이 자아내는, 채우기보단 비워내는 데 방점이 찍혔으리라 짐작했다.
하나 막상 전시장에 들어서면, 월척은 낚은 숫자로 좌우되는 게 아님을 절감한다. 뭣보다 상설전시실이 그랬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인 제프 쿤스(63·미국)와 데이미언 허스트(53·영국)의 작품 2점. 센 작품들이 떡하니 버티고 서주니 허전한 구석이 없다. 예술도 인생처럼 역시 한 방인가 보다.
쿤스의 ‘Gazing Ball―Farnese Hercules’는 여러모로 이날의 스타였다. 작품도 중앙 화점을 차지했는데, 작가까지 개막식에 왔으니 눈이 쏠릴 수밖에.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은 ‘친절한 톰 (크루즈) 아저씨’였다. 클래식 조각이나 그림에 푸른 유리구슬을 더하는 이 연작 시리즈를 두고 “가장 순수한 형태인 구체(globe)는 사방을 비추며 관객이 우주 속 어디에 있는지를 짚어주는 일종의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라며 “서양철학이나 동양사상에 깃든 관대함과 관용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유려한 설명이 아니더라도, ‘씨알 굵은’ 볼은 꽤나 상상력을 자극한다. 영화에서 보던 미지의 타임머신이 시공간을 거스르고 고대 그리스로 날아간다면 저런 생김새가 아닐는지. 다만 높이 3.26m짜리 작품이라 그런가. 인간과 피를 나눈 ‘살가운’ 헤라클레스보다 콧대 높은 ‘신들의 신’ 제우스를 닮아 보였다.
그 슈퍼 초인 오른쪽을 장식한 허스트의 ‘Aurous Cyanide’도 존재감이 대단했다. 전시 측은 “제목은 ‘시안화 제1금’이란 맹독성 화합물을 지칭한다”고 설명. 가로세로 9×3m에 이르는 화폭에 형형색색 동그라미를 경쾌하게 채운 작품이 죽음의 독극물이라. 생사의 경계를 건너가는 꽃상여 행렬이 어디선가 메아리로 피어오를 듯하다.
판테온 신전처럼 우뚝한 상설전시실 경치. 기에 눌릴 법도 하건만, 김호득(68) 이배 작가(62)가 채운 기획전시실도 만만찮았다. 우아하되 정갈한 향취가 조선의 여백 같은 매무새랄까. 광활한 공간을 맘껏 펼쳐놓아 작가들도 결과물에 상당히 만족했단 후문이다.
특히 김 작가의 ‘문득, 공간을 그리다’는 감히 올해 꼭 봐야 할 전시로 꼽고 싶다. 넓은 사각 수조에 먹물을 담고 위로 한지 수십 장을 늘어뜨렸는데, 창덕궁 달빛 기행을 거니는 기분이랄까. 숨을 고르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작가만 허락한다면, 푹신한 의자 하나 구해다 한참 멍을 때리고픈 욕구가 일었다.
흰눈이 펑펑 내린 산골 탄광촌이 떠오르는 이 작가의 ‘불에서 부터’도 예사롭지 않다. 널찍한 바닥 전면에 한지를 깔고 거대한 숯 구조물을 띄엄띄엄 배치했다. 전시실 자체가 하나의 수묵화가 돼버린 풍경. 을씨년스러운데 깊은 열기를 머금었다.
이날 개관식에 참석한 전필립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은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를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조화를 담은 새로운 아시아 모던&컨템포러리 아트의 허브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10월 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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