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명에 관한 옥사(獄事)는 군현에서 항상 일어나고 목민관이 항상 마주치는 일인데도, 실상을 조사하는 것이 언제나 엉성하고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흠흠신서’에 그가 적어 놓은 집필 동기다. ‘흠흠신서’는 중국과 조선에서 발생한 여러 살인 사건을 유형별로 분류하고 사건 처리 문제점과 비평 등을 덧붙인 법률서이자 형법, 수사학 지침서다. 그는 살인사건 등의 1차 조사 및 처리를 담당해야 할 지방관들의 무거운 책임을 일러주고자 했다.
이 책은 정치학, 철학, 과학, 경제 등 다양한 학문에 일생을 바쳐온 정약용의 법학자적 면모에 주목한다. 저자는 “다산이 가진 여러 면모 가운데 법학자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며 연구 활성화를 강조했다.
오늘날 법학과 유사한 ‘율학(律學)’은 조선 선비들에게 등한시됐다. 잡과시험에 율과가 있었지만 중인 이하 신분층이 주로 율학을 공부했다. 당시 사대부인 그는 어떻게 법학에 관심을 갖고 독보적인 법률 전문서적을 쓸 수 있었을까. 이 책은 그의 생애를 차분히 펼쳐놓는다.
28세 나이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암행어사에 임명돼 전·현직 수령들의 수많은 비위행위를 목도했다. 마지막 관직인 형조참의 시절에는 정조 재위기간에 벌어졌던 형사 사건에 관한 수사, 검시, 재판기록을 모아놓은 ‘상형고’를 열람했다. 법 집행 관리로서 백성들의 누명을 풀어준 적도 많았다. 저자는 이런 그의 경험이 “전무후무한 판례연구서 ‘흠흠신서’를 편찬하는 데 밑거름이 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법관의 중립적인 태도도 강조했다. 그는 법관의 덕목으로 옥사를 신중히 처리하고 옥사에 연루된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뜻을 지닌 ‘흠휼(欽恤)’을 꼽았다. 또 철저한 진술 청취, 명쾌한 판단과 신속한 옥사 처리, 뇌물 수수 금지를 명심하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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