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벌레, 일 중독자, 무술 유단자,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 백인의 시선에서 동양인을 고정관념 속 조연으로만 그렸던 미국 할리우드. 그곳에 대고 한 영화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미치도록 잘 놀 줄도 안다. 미치도록 돈 많은 거부도 있다. 다시는 아시아를 무시하지 마라!”
25일 개봉하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주연 배우가 모두 아시아인으로 구성된 ‘화려한 비주얼’의 영화다. 미국에서는 8월 개봉해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단독 영화로는 올해 최고 성적. 세계적으로 2억2663만 달러(약 2567억 원)를 벌며 제작비 7배를 거둬들였다. 대성공에 힘입어 이미 속편 제작까지 확정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다. 나폴레옹이 1803년 중국을 지칭해 남겼다는 말로 포문을 연다.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마라. 사자가 깨어나면 세계가 흔들릴 것이다.”
이어지는 건 1995년 영국 런던 한 호텔. 쏟아지는 비를 뚫고 호텔에 도착한 엘레노어 영(양쯔충·양자경)은 방이 없다며 문전 박대를 당한다. 전화조차 쓰지 못하게 해 공중전화로 남편과 통화하고 돌아온 순간. 사장이 버선발로 뛰어내려와 “우리 호텔을 인수한 새로운 오너”라고 소개한다.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던 리셉션 직원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호텔과 부동산 사업으로 어마무시하게 돈 많은 집안 후계자인 닉 영(헨리 골딩)의 여자친구 레이첼 추(콘스턴스 우). 중국계 미국인으로 뉴욕대 경제학 교수였던 레이첼은 닉이 그 정도로 부자라는 건 꿈에도 모른다. 그러다 닉의 친구 결혼식이 열리는 싱가포르에 가면서 엘레노어를 만난다. 아들을 끔찍이 여기는 엘레노어와 친척의 ‘시월드’는 레이첼을 돈 밝히는 여자라 비난하며 온갖 시련을 겪게 만든다.
내용의 큰 줄기만 보면 사실 영화는 매우 낯익다. 한국 시청자들이 욕하면서도 챙겨 본다는 ‘막장 드라마’의 고부 갈등을 뼈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차이라면 할리우드에서 만든 만큼 차원이 다른 스케일. 바다 위에 띄운 거대한 호화선이나 궁궐을 연상케 하는 저택에서 열리는 각종 결혼 전야제 파티, ‘버진 로드’에 물이 흐르는 결혼식까지, 그 화려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아콰피나 등 미국에서 활약하는 아시아 배우들의 개성 넘치는 감초 연기가 극의 재미를 더한다.
다만 ‘크레이지…’는 아시아에 사는 동양인보다는 미국에 거주하는 아시아인을 겨냥한 작품이다. 예를 들어 레이첼은 ‘이기주의적인 미국적 사고를 갖고 있다’거나 겉만 동양인이고 내면은 백인이라고 지적받는다. 이런 설정이 국내에서 얼마나 공감대를 형성할지 의문이다. 미국에선 충격적 캐스팅이었던 아시안 배우들이 국내에서 얼마나 티켓 파워가 있을지도 미지수다. 우리는 영화관이든 TV든 원래 다 동양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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