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국 기자의 슬기로운 아빠생활]<4>이성의 끝을 잡고 갔지만…베이비 페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23일 15시 51분


<제작: 디지털뉴스팀 채한솔 인턴>
<제작: 디지털뉴스팀 채한솔 인턴>
‘베이베 페어(베페·육아용품 박람회)’에 갔다. 초보 아빠들의 필수 코스다. 남자들이 백화점을 갈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어느 교수님의 말이 떠오른다. 남자들이 백화점에 갈 때 받는 스트레스는, 전투기 조종사가 적기를 마주했을 때 받는 스트레스와 비슷하다고 했다. 나는 베페에 여러 번 갔다.

아빠들을 관찰해 봤다. 베페를 찾은 아빠들 중 엄마보다 먼저 행사장으로 걷는 사람은 드물다. 적기를 마주하러 가기 때문일 테다. 행사장 안내지도를 남편이 주도적으로 찾아다는 경우도 거의 못 봤다. 적기를 억지로 찾아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일 테다. 마지못해 따라왔다는 느낌이 드는 아빠들이 많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어느 부스에는 유독 혼자 온(정확히는 혼자 서 있는)아빠들이 많았다. 맥주라도 주는 건가? 하지만 혼자 온 아빠들 일 리 없다. 특정 시간에 일부 선착순 방문객들에게 경품을 주는 곳이다. 경품 추첨 30분 (더 이상일 수도) 전에 미리 줄 선 아빠들이다. 혼자 줄 선 엄마들은 없다. 베이비페어에서 물건을 사는 주체는 대부분 엄마들이라는 반증일 수 있다.

베페의 팁 중 하나는 휴대전화 배터리 충전을 가득 하고 가라는 것이다. 줄 서서 게임을 하던, 어제 못 본 축구라도 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육아는 ‘아이템 빨’ 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뭔 육아용품이 이리 많냐. 과거 부모들은 이런 물건 없이도 애만 잘 키웠을 텐데. 물론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카시트를 사러 갔다. 내가 볼 땐 다 똑같다. 하지만 막상 보면 또 다 다르다. 내가 이걸 많이 본다고 좋은 카시트를 살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내는 블로그 후기를 살핀다. 후기를 보고 맘에 드는 브랜드를 공략하는 수법이다. 외부 평가에서 우수한 상을 받은 브랜드를 살펴봤다. 젠장, 모든 브랜드가 다 1등이란다. OO협회 선정 1등, OO신문사 선정 1등… 신문사 선정 1등의 경우 어떻게 브랜드 상을 타는지 알기 때문에 그냥 피식 하고 만다.

카시트에 타는 건 내 자식일 텐데, 막상 내 자식은 뱃속에 있다. 아이러니하다. 자식들을 데려온 부모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카시트에 앉으려 하지 않고 울어버린다. 막상 물건을 쓸 사람은 현장에 없는 아이러니함이야 말로 베페의 진가 아니겠는가.

관계자로부터 카시트 설명을 듣는다. 다 좋단다. 단점이 없다. “이런 기능은 없네요?” 라고 공격했다. “네 그게 아쉽죠”라는 방어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 그런 기능을 대신해서 요 상품이 있습죠 헤헤” 로 응수 한다. 역공에 당했다. 주도권은 카시트 관계자에게 있다.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눕히며 기능을 설명한다.


곰곰 생각해보니 차 사고를 전제로 카시트 설명을 듣고 있었다. 사고를 전제로 한 물건 구매라니 묘하다. 사고 안 나게 조심해서 운전해야겠다. 안전이고 뭐고 결국 마지막에 묻는 건 가격이다.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 사은품까지. 상품 구매의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가격을 들으면 온라인 최저가를 검색한다. 별 차이 없다. 하지만 직접 와서 봤다며 스스로 만족한다. 사은품 몇 개를 더 준단다. 뭔가 승자가 된 느낌이다.

소기의 구매 목적을 달성했다고 곧 바로 베페를 빠져나올 수 있는 아빠는 거의 없다. 아니 의무적으로 한 바퀴는 돌아야 한다. 아내가 함께 있지 않는가? (커피와 각종 먹거리도 있으니 참자) 하지만 아빠들은 자주 읊조려야 한다. “여기는 베페다. 이성을 잃지 말자” 이 곳은 이성을 잃는 순간 두 손에 엄청난 양의 육아용품이 들려지는 전쟁터다.

나와 아내는 카시트 구매라는 목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전쟁 속 상처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아기 과자와 인형, 비누방울 등이 내 손에 들려 있다. 첫째를 위한 놀이템을 산 것이라며 위안을 삼아본다. 물론 살 생각이 전혀 없던 물건들이다.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갔지만, 나도 별 수 없었다. 베페를 돌아다녀보면 집에있는 육아용품들이 더러 보였다. 나도 대세 육아용품을 구매하는 소비자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육아를 처음 할 땐 “나는 다른 육아를 할 거야”라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결국 나도 별 수 없더라. 어쩌면 어느 정도 대세에 따라주는 것이 슬기로운 아빠생활을 위한 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변종국 기자bj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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