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미 넘치는 북구의 신화, SF판타지의 새 원형 자리매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25일 03시 00분


[스마트시대 문화전쟁 글이 무기다]
<4> 드라마 ‘바이킹스’ 음악감독 에이나르 셀비크의 숲

역사 드라마 시리즈 ‘바이킹스’(위 사진)와 게임 ‘갓 오브 워’(아래 왼쪽), ‘클래시 오브 클랜’. 바이킹 전설과 북유럽 신화를 흥미롭게 재해석한 콘텐츠다. A&E네트웍스 제공
역사 드라마 시리즈 ‘바이킹스’(위 사진)와 게임 ‘갓 오브 워’(아래 왼쪽), ‘클래시 오브 클랜’. 바이킹 전설과 북유럽 신화를 흥미롭게 재해석한 콘텐츠다. A&E네트웍스 제공
황금빛 철갑 투구 아래 하얀 피부를 드러낸 장신의 여전사. 판타지 게임 광고들이 약속한 듯 내세우는 이런 대표 이미지는 어딘지 북유럽 여인을 닮았다.

어쩌면 당연하다. 요즘 판타지 게임 속 여전사의 전형은 모두 북유럽 신화 등장인물 ‘발키리’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신화 속에서 발키리는 용맹한 바이킹 전사들을 오딘이 사는 ‘발할라’로 인도하는 이들이다.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투사들이 집착적으로 외치는 그 ‘발할라’다. 마블 코믹스의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토르는 북유럽 신화 속 신이며 라그나로크(라그나뢰크)는 ‘신들의 황혼’으로 불리는, 신화 속 마지막 전쟁이다. 핀란드 게임 제작사 ‘슈퍼셀’의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에도 발키리가 등장한다.

세계가 북유럽 신화에 열광하고 있다. 동양의 삼국지, 서양의 그리스·로마 신화가 지배하던 게임, 영화, 만화 시장에 21세기 들어 스칸디나비아의 비장미 넘치는 캐릭터가 빠른 속도로 침투하고 있다.

○ 그리스·로마 신화 ‘덮어쓰기’ 한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는 이제 전 세계 SF판타지의 새 원형이다. 인기 게임 시리즈 ‘갓 오브 워’는 2005년부터 13년간 이어온 그리스·로마 신화 배경을 올 4월부로 끝내버렸다. 새 ‘갓 오브 워’의 배경은 북유럽 신화다. 게임 제작사 넷마블이 최근 낸 야심작 ‘팬텀게이트’도 아예 북유럽 신화가 기반.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의 저자 이경덕 씨는 “그리스 신화가 이성적이고 반듯한 낮의 세계관이라면 북유럽 신화는 급격한 변화기인 현대에 어울리는 밤의 세계관이다. 세계인들 마음속에서 신화의 중심축이 낮에서 밤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유럽 신화는 음악의 주제로도 부활한다. 세계에 팬덤을 가진 북유럽 헤비메탈과 중세 포크 음악 열풍에는 신화에 뿌리를 둔 독특한 세계관이 있다. 한 명의 독특한 예술가를 만나기 위해 바이킹의 서방 항로가 시작된 관문 도시, 노르웨이 베르겐으로 향했다.

○ 전통의 창의적인 발전…블랙 메탈의 역설

바이킹의 거센 포효가 당장이라도 몰려올 듯한 해안이었다. 베르겐시 서쪽 끝에 위치한 베르겐후스 요새. 1240년 건축된 이곳은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요새다. 한 손에 중세 악기 ‘크라비크 리라’를 든 에이나르 셀비크(39)를 만났다.

셀비크는 다국적 드라마 ‘바이킹스’의 음악 감독이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세계적 인기 시리즈. 국내에서는 넷플릭스로 방영 중이다. 작가는 영국인 마이클 허스트(66). 헨리 8세를 둘러싼 이야기 ‘튜더스’ 시리즈를 성공시킨 그의 다음 타깃이 스칸디나비아와 바이킹 역사다.

셀비크는 한때 사회악으로 불렸다. 유명 블랙메탈 밴드 ‘고르고로스’의 드러머였다. 1990년대 초반 북유럽에서 태동한 블랙메탈은 헤비메탈 중에서도 가장 극단을 추구했다. 시체처럼 얼굴을 칠하고 괴수의 목소리로 반기독교적 노래를 불렀다. 교회에 연쇄 방화를 하기도 했다. 당시엔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이들만큼 북유럽의 전통 문화를 창의적으로 보존·발전시킨 이들도 없었다. 기독교의 보수성에 반기를 들며 사나운 이미지를 위해 차용한 북유럽 신화의 이미지와 바이킹의 선율 덕이다.

○ 사회악에서 왕실 ‘최애’ 음악가로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만난 드라마 ‘바이킹스’ 음악감독 에이나르 셀비크. 옛 악기 ‘크라비크 리라’를 들고 베르겐후스 요새 앞에 선 그는 “옛 의식의 분위기까지 담아내기 위해 춘분과 추분에 햇볕이 선돌 무덤을 투과한 시각에 맞춰 녹음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베르겐=임희윤 기자 imi@donga.com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만난 드라마 ‘바이킹스’ 음악감독 에이나르 셀비크. 옛 악기 ‘크라비크 리라’를 들고 베르겐후스 요새 앞에 선 그는 “옛 의식의 분위기까지 담아내기 위해 춘분과 추분에 햇볕이 선돌 무덤을 투과한 시각에 맞춰 녹음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베르겐=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셀비크는 사회악에서 왕실의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로 인생 역전을 했다. 유명 블랙메탈 밴드 ‘인슬레이브드’의 리더인 이바르 비에른손과 함께 그는 2014년, 노르웨이 건국 200주년 기념 음악을 만들었다. 의뢰인인 왕과 왕비 앞에서 공연했고, 오슬로 선박박물관에서 연주한 최초의 대중음악가가 됐다. 셀비크는 영국 옥스퍼드대에 초빙돼 ‘전통음악의 창의적 계승과 발전’을 주제로 강의도 했다.

셀비크의 새 출발은 2003년 포크 밴드 ‘바르드루나’ 결성이었다. 메탈 밴드 탈퇴 후 비공인 음악학자가 돼 고국의 오랜 포크 음악 연구에 몰입했다. 탄탄한 문헌을 기반으로 한 독창적 음악 작업이 시작됐다.

“데뷔 앨범 제작에만 7년 걸렸습니다. 노르웨이 전역에 흩어진 민속박물관과 고서 도서관을 뒤지며 탐정처럼 단서를 모았죠. 고대와 중세 악기를 연구해 재현했고, 희미하게 남은 기독교 전파 이전 노르웨이인들의 생활양식과 의식 음악을 파고들었습니다.”

○ “하짓날 정오 신성한 숲에서 녹음”

연구 다음은 실행. 이번엔 인디애나 존스의 탐사 모험 여정을 방불케 했다. 편안한 도시의 스튜디오를 놔두고 고생을 자처했다. 노르웨이 서안의 튀스네스를 비롯한 각지를 돌며 옛 문헌에만 기록된 숨은 성지를 찾아내 녹음장비를 설치했다. “춘분, 추분, 하지, 동지에 석조물을 투과한 태양빛이 특정 지점에 모이는 곳이 있습니다. 선인들의 의식 장소죠.” 신성한 숲에 들어가 자작나무 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채록했고 산 속 냇물 한가운데 서 노래를 녹음했다. “숲속에서 횃불로 북을 두드리기도 했죠. 조상들의 성지에 깃든 분위기가 듣는 이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랐으니까요.”

바르드루나의 독특한 음악은 입소문을 탔고 ‘바이킹스’ 제작진은 시즌 2부터 아예 셀비크를 음악감독으로 기용했다. “숲속 나무, 검, 방패, 도끼를 타악기처럼 두드려 음악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바이킹들의 소리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려 노력했죠.”

○ 콘텐츠의 보고…북유럽 신화 다시 읽기 바람

이날 베르겐후스 요새를 배경으로 열린 바르드루나의 콘서트는 형언하기 힘든 장관이었다. 거대한 염소뿔피리가 대취타처럼 등장한 뒤 크라비크 리라, 고대 하프가 나와 합류하며 불길하고 장엄한 소리 풍경을 만들어냈다. 청중을 1000년 전의 신비한 숲으로 이끌었다.

“바르(War)는 ‘수호자’를 뜻합니다. 팀명 바르드루나는 ‘룬의 수호자’란 의미죠.”

바르드루나는 2016년까지 3부작 음반을 냈다. 3개의 룬(Rune) 문자를 콘셉트로 이야기를 풀어간 음반이었다. 룬은 북구의 고대 상형문자다. 바르드루나의 수수께끼 같은 가사는 자국민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베르겐 일대의 옛 방언과 고대 노르웨이어를 섞어 만들기 때문이다.

‘바이킹스’와 바르드루나처럼 신화와 전설을 기반으로 한 흥미로운 콘텐츠가 잇따라 나타나자 이곳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10, 20대 젊은이들 사이에도 북유럽 신화 다시 읽기 바람이 불고 있다.

“저의 연구와 창작은 노르웨이의 전통 복원만을 위한 작업이 아닙니다. 세계 각지의 고대 음악을 연구할수록 인류가 서로 비슷하면서도 각자 고유한 문화를 일궈왔음에 놀랍니다. 갈수록 획일화되는 세상에서 우리 인류는 각자의 뿌리를 찾아가는 긴 항해를 떠나야 합니다.”

‘바이킹스’의 주인공 라그나 로스브록의 모습이 셀비크의 땋아 올린 머리 아래로 엿보였다.

오슬로·베르겐=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출처: 유튜브>
#북유럽 신화#갓 오브 워#클래시 오브 클랜#에이나르 셀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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