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배우 A씨(27·여)는 올해 초 한 영화 오디션에서 겪었던 악몽 같은 일이 잊혀지지 않아 힘들다. 조연을 지원했는데 면접장에서 제작자가 “(옷을) 벗으면 주연을 시켜주겠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A씨는 가까스로 “그건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거절한 뒤 면접장을 뛰쳐나왔다. A씨는 “너무 두려워 지금까지도 면접을 보러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신인 배우나 배우 지망생들은 이런 일은 흔하다고 입을 모은다. 10대 보이밴드 ‘더 이스트라이트’에 대한 프로듀서의 폭행 사실이 폭로되기도 되면서 출연료 미지급, 성추행, 폭행 등 문화계에 만연한 ‘을(乙)의 설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예술계의 불공정거래를 개선하기 위해 한국콘텐츠진흥원에 공정상생센터,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예술인 신문고 제도 등이 운영되고 있지만 무용지물인 현실이다.
배우 민지혁은 영화 ‘임의 침묵’ 제작사가 오디션 배우들에게 면접비 1만 원을 요구했다고 지난달 폭로했다. 연출을 맡은 한명구 감독은 “오디션비는 관행이며 지원자들의 간식비로 다 쓰였다”고 반박했다. 배우 지망생들도 “면접비 요구는 종종 있었던 일”이라는 반응이다. 한 영화계 구인구직 온라인 사이트에는 여전히 1만 원선의 면접비를 요구하는 공고가 적지 않다. 신인 배우 김모 씨(25·여)는 “면접비 5000원을 준비하지 못해 면접장을 갔는데 ‘이 정도도 못 내냐’는 핀잔을 들었다”고 말했다. 제작사는 보안을 이유로 작품 제목, 감독, 촬영 일자 등을 공개하지 않아 어떤 역할에 캐스팅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면접을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질적 문제인 출연료 미지급도 여전하다. 작품에 출연하는 것 자체를 ‘스펙’으로 인식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신인 배우 B씨(25·여)는 “정당한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이 되어도 ‘사전에 계약서를 쓰자’고 하면 제작사에서 화를 낸다”고 말했다. 배우들 사이에는 제작사가 계약서 작성을 거론하지 않으면 출연료를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을 정도다. 원로배우 이순재 씨도 “나도 몇 년 전 제작사로부터 출연료를 받지 못한 일이 있다”며 “우리 드라마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지만 배우들은 돈을 받지 못한다. 창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말했다.
교육을 명분으로 기획사에서 연습생에게 금전을 요구하는 악습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바른미래당 김수민 의원이 한국콘텐츠진흥원으로부터 받은 ‘대중문화예술 법률자문내역’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올해 8월까지 163건의 상담 중 75건이 연습생에 대한 기획사의 무리한 금전 요구나 계약 불이행에 대한 고소·고발이다.
연습생들은 데뷔할 기회가 제한된데다 소속사 대표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수직적 구조가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3년 간 아이돌 그룹 데뷔를 준비했던 C씨(23)는 “소속사 없이 연예인으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폭언, 폭행은 당연히 참고 견뎌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부모가 나서 ‘조금만 참자’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2009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연예인을 위한 표준전속계약서를 마련해 적정 전속기간, 기본권 등을 명시했다. 하지만 이는 권고 사항에 불과해 실질적인 구속력이 없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관계자도 “해당 규정을 위반해도 이를 단속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문제를 제기해 신분이 드러나면 해당 분야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현실도 피해자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문화계에서는 약자인 신고인이 권력을 쥐고 있는 피신고인과 얼굴을 맞대고 피해를 입증하고 합의해야 하는 절차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지운: 가난한 단역배우들, 면접비 챙겨주진 못할망정 오디션비 요구라니! 규진: 벼룩의 간을 빼먹네. 지운: ‘열정페이’가 제일 심한 곳이 문화계인 것 같아. 규진: 연예인도 TV에선 화려해보이지만, 그들도 결국 을(乙)이지. 지운: 그래서 내가 연예인 안 한 거야.
규진: ;; (당황)
▼ “단역 배우들은 근로계약서 쓸 수 있다는 생각도 못 해요” ▼
임금체불다큐 만든 배우 곽민석
“단역 배우들은 본인들이 근로계약서를 쓸 수 있다는 생각도 못 해요. 계약서 얘기 꺼냈다가 좁은 판에서 ‘건방진 애’로 찍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니까요. 돈을 못 받아도 제작자가 ‘미안하다, 다음 작품 때 비중 있는 역할 챙겨줄게’ 하면 혹할 수밖에 없죠. 그만큼 일이 급하니까요.”
영화 ‘범죄의 재구성’, 드라마 ‘태양의 후예’ 등에 출연해 대중에게 낯익은 20년차 배우 곽민석 씨(48)가 배우들의 임금 미지급 문제를 고발하고 나섰다. 그는 2016년 출연한 웹드라마 ‘행복한 인질’ 제작진의 문제점을 다룬 10분짜리 미니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다. 그를 26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웹드라마 ‘행복한 인질’ 촬영에 참여한 배우와 음향, 조명, 분장 스태프 등 40여 명은 일한 대가를 지급받지 못했다. 함께 일한 후배들의 수당을 자비로 미리 챙겨 준 스태프들은 빚더미에 나앉기까지 했다. 제작사 대표는 “지금은 돈이 없다. 해외에 판권이 팔리면 임금을 지급하겠다”며 버티다 잠적했다.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었지만 대부분 근로계약서가 없다는 이유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
“단돈 5만원을 받더라도 계약서를 당연히 쓰는 문화가 정착돼야죠. 만약 불가피하게 계약서를 못 썼다면 당일 퇴근할 때 임금을 지급하는 게 맞고요. 또 제작현장에는 제작비 활용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프로덕션 수퍼바이저(PS)가 있는데, 이 사람들이 인건비 지급에 문제가 없었는지, 부당한 대우는 없었는지를 감시해주면 어떨까 싶어요.”
곽 씨는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2008년 MBC 드라마 ‘돌아온 일지매’에 출연하고도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제작사는 출연료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어느 날 회사가 없어졌다. 해당 제작사 대표는 뻔뻔하게 새 회사를 차려 버젓이 영업을 계속했다. 그는 이와 비슷한 사례가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저는 그 돈(출연료) 못 받아도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차비조차 없어서 촬영장까지 걸어 다니는 많은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선례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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