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에 있는 교토국제만화박물관은 간사이 지방을 여행하는 ‘만화 덕후’라면 필수로 방문해야 하는 ‘성지’로 꼽힌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띈 건 30만여 권의 장서를 연도별, 주제별로 정리한 ‘만화의 벽’이었다.
부모 손을 잡고 온 어린 아이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인까지 너나할 것 없이 서가에서 뽑아낸 만화를 몇 권씩 쌓아놓은 채 읽고 있었다. 서가 옆에 놓인 안락의자에 기대앉거나 박물관 앞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누워 만화를 읽는 모습에서 만화를 일상의 일부로 함께하는 일본인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베르사유의 장미’의 작가 리요코 이케다를 비롯한 일본의 전설적인 만화작가 120명의 손을 본뜬 석고상도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아라마타 히로시 만화박물관 전무는 “만화는 일본이 지켜내야 할 문화적 보물”이라며 “최대한 많은 양의 만화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을 우리 박물관의 소임이다”고 밝혔다.
●영화, 게임, 드라마…세계 콘텐츠 시장의 원천, 일본 만화
최고의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찬사를 받으며 200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톰 크루즈 주연의 할리우드 SF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셀 수 없을 정도다. 발표 후 2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애니메이션 ‘슬램덩크’는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 ‘데스노트’와 ‘진격의 거인’은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실사 영화로도 제작됐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6년 일본의 만화 시장 규모는 약 26억4000만 달러(약 3조 원)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 2~5위인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을 합친 것보다 크다. 그야말로 ‘망가(マンガ·漫畵) 공화국’이다.
만화는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영화를 비롯해 연극, 뮤지컬, 게임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확장성을 지녔다. 파생 콘텐츠까지 아우르면 일본 만화의 시장 규모는 약 30조 원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 만화는 바야흐로 세계 콘텐츠 시장의 영양분을 공급하는 원천이다.
2년 전 ‘포켓몬고’ 열풍을 일으키며 가장 성공한 증강현실 활용 콘텐츠로 꼽히는 ‘포켓몬스터’는 세계적 팬덤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에 정식 번역 출간된 최초의 일본 만화이자 서구권에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표적인 ‘양덕(서양인 덕후)’ 만화로 꼽히는 ‘드래곤볼’ 시리즈 역시 한 해가 멀다 하고 PC와 콘솔용 게임으로 제작되고 있다.
일본 만화의 향기가 짙게 밴 작품도 세계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영화 ‘퍼시픽 림’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스스로를 일본 만화의 열성팬이라고 말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서구영화에서는 거대 로봇에 대한 전통이 없다. ‘철인28호’ 등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실제 ‘퍼시픽 림’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에반게리온’과 ‘마징가Z’를 묘하게 섞어놓은 듯한 인상을 풍린다. 지구를 위협하는 괴물의 이름인 ‘카이주’는 ‘괴수(怪獸)’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영상으로 재창조되는 만화 ‘고독한 미식가’
만화 ‘고독한 미식가’는 일본 TV도쿄가 드라마로 만들어 큰 사랑을 받았다. 9월 일본 도쿄 기치죠지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만화의 작가 구스미 마사유키(60)는 활자 콘텐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화든 소설이든,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독자가 머릿속에서 한 편의 영화를 그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드라마 ‘고독한…’은 언뜻 보면 별다른 내용이 없다. 평범한 세일즈맨인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마츠시게 유타카)가 일을 마친 후 “배가 고파졌다”는 대사를 날리며 근처 식당에 들어가 ‘혼밥’을 한다. 사람들은 이 ‘아무것도 없는’ 드라마에 열광했다. 2012년 첫 시즌이 방송된 이후 일곱 개의 시즌으로 제작됐으며, 시즌8도 준비 중이다. 중국에서도 판권을 사들여 중국판 드라마가 나왔고, 2018년 말 초연을 목표로 연극으로도 제작 중이다.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어 한국으로 출장 온 주인공이 한국 식당을 찾는 내용을 담은 특별편도 제작됐다.
만화책을 읽는 독자는 음식의 맛과 냄새, 조리할 때와 맛볼 때 나는 소리 등을 직접 느낄 수 없다. 심지어 ‘고독한…’은 전 페이지가 흑백이어서 음식의 색깔조차도 보여줄 수 없다. 하지만 구스미 작가는 이런 한계야말로 만화가 가진 장점이라고 했다.
“흑백의 그림과 글자만 보고 그 속의 상황을 독자가 스스로 그려내야 합니다. 반면 드라마나 영화 등 영상 매체는 냄새와 맛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직접 전달하기에 시청자가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적죠. 그렇기에 책이야말로 독자 입장에서 가장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콘텐츠입니다.”
만화 ‘고독한…’의 대사량이 많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음식의 맛과 식당의 분위기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는 독자가 음미하며 상상해보기를 원했다. 다니구치 지로 선생(‘고독한…’의 그림 작가)도 음식을 먹을 때 나오는 주인공의 미세한 표정변화를 표현해내는 데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고 설명했다.
만화가 영상으로 재창작되기 좋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읽는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질 여지가 많아 제작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기 좋은 ‘소스’가 된다. 시청자 입장에서도 같은 작품이라도 누가 영상화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물이 천차만별이 되니 원작을 읽었더라도 또 다른 해석을 경험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이 만화를 그릴 땐 영상으로 만들어질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만화에는 이렇다할 스토리도, 극적인 갈등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만화가 드라마와 연극으로 만들어지는 건, 만화야말로 창작자들이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해 뛰놀 수 있는 바탕이 되는 플랫폼이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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