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는 예전에는 개그 코드로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성차별 코드가 됐습니다.”
요즘 드라마나 예능 PD, 작가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을 두고 남녀 시청자들의 날선 공방이 이어지기 때문. 여성 차별, 남성 혐오 등 성대결로까지 치달았던 사회적 분위기가 방송계에도 불어닥친 모양새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이들 사이에선 “사회현상을 제대로 설명하기도 무섭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과거 여성의 성 상품화에만 초점이 맞춰졌던 것과 달리 남성들도 성 비하 발언이나 행동에 민감해졌다. 9월 MBC 드라마 ‘숨바꼭질’에서 여주인공 민채린(이유리)이 남성 목욕탕에 무단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나체로 목욕 중인 남성들이 모자이크 처리된 채 노출됐다. 시청자들은 “성범죄로 볼 수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성별이 뒤바뀌었다면 방송에 내보낼 수 있었겠느냐” 등 비판과 함께 제작진의 사과를 요구하는 글들이 시청자 게시판에 쏟아졌다. 결국 제작진은 “여주인공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통념을 깨나가는 과정을 그리기 위한 의도로 촬영된 장면”이라며 “의도와 달리 시청자들에게 불쾌감을 안기게 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지난달 20일 tvN 예능 ‘최신유행프로그램’에서 복학생 중 군대 이야기에 집착하는 이들을 ‘군무새’(군인과 앵무새의 합성어)로 지칭한 것을 두고도 논란이 일었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통쾌하다” “공감 간다”는 내용도 있었지만 “남성 조롱은 개그 소재가 아니다” “나라를 위해 2년간 고생했으면 부심(자부심) 좀 부리면 안 되느냐” 등 치열한 댓글 싸움이 펼쳐졌다.
지난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심의소위원회는 tvN 예능 ‘짠내투어’에서 남성 출연자가 여성 출연자에게 “호감이 가는 남성과 별로였던 남성에게 각각 맥주잔을 채우라”고 한 장면에 대해 법정 제재를 의결했다. 방송소위는 “사회 전 분야에서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제작진의 성 평등 감수성 부재로 시청자의 윤리적 감정과 정서를 해쳤다”고 밝혔다. 일부 시청자는 방송을 보며 실시간으로 방심위에 신고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방송 프로그램 속 성차별은 만연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7월 한국양성평등진흥원이 지상파 3개사, 종합편성채널 4개사, 케이블채널 2개사의 예능, 오락 프로그램 중 시청률이 높은 33개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한 결과 성차별적 내용이 성평등적 내용보다 4.6배 많았다고 밝혔다. 성차별적 내용은 32건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이 가사노동을 전담하고 집안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 많았다.
제작진 사이에서는 성차별 논란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쓰는 분위기가 강화되고 있다. 한 지상파 예능 PD는 “팀장이 회의 때마다 ‘양성평등적인 시각을 가지고 제작하라’고 지시한다”고 말했다. 본방송 이후 혹여 비판이 있는지 시청자 게시판을 꼼꼼히 살피는 습관도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 이모 씨는 “픽션이지만 드라마도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성차별적 요소가 있더라도 사회현상을 제대로 설명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러기가 어려워 걱정된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방송계가 그동안 성차별적 문제에 무감각했다는 방증”이라며 “제작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성차별적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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