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자본주의는 면화 농장에서 싹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3일 03시 00분


◇면화의 제국/스벤 베커트 지음·김지혜 옮김/848쪽·4만2000원·휴머니스트

20세기 초 면직 공업이 급격히 팽창한 미국 남부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한 방적공장에서 일했던 소녀의 모습. 공장에서 1년간 일한 소녀의 키는 130cm이고 낮뿐만 아니라 때로는 밤에도 일했으며 나이를 묻자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휴머니스트 제공
20세기 초 면직 공업이 급격히 팽창한 미국 남부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한 방적공장에서 일했던 소녀의 모습. 공장에서 1년간 일한 소녀의 키는 130cm이고 낮뿐만 아니라 때로는 밤에도 일했으며 나이를 묻자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휴머니스트 제공
대량생산되는 형태의 자본주의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보통 18세기 말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자본주의’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자본주의의 태동을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 특정 국가 혹은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성격과 발전 양상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발적이지만 저자는 공장과 임금노동자의 출현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됐다는 통념에 반기를 든다. “자본주의의 탄생과 재편의 중심에 면화가 있다”는 것이다. 10년간 전 세계 기록보관소와 도서관을 다니며 보송보송하고 흰 섬유인 면화가 근대에 어떻게 생산되고 거래됐는지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11세기 즈음부터 인간은 면화를 재배했다. 멕시코 등 태평양 연안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작은 솜뭉치 같은 흰색 다래를 맺는 작물을 재배하며 이를 ‘이치카틀’, 즉 면화라고 불렀다. 섭씨 10∼16도가 유지되면서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 지역에서 면화 재배가 시작됐다. 식물학자들에 따르면 면화는 개화기를 당기거나 미루거나 멈추는 등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한다.

저자가 면화에 주목한 이유는 간단하다. 20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제조업이 면직물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0년에는 세계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수백만 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가 면화를 재배하거나 운반하고 직물을 생산했다”고 강조한다.

면화의 역사 초기에 유럽은 주변부에 있었다. 인도, 중국, 서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서 면화 생산을 주도하던 때만 해도 유럽인은 면화에 무지했다. 대부분 양모와 아마로 된 옷을 입었다. 그러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상륙하고, 5년 뒤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유럽에서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하면서 면화 역사의 패권은 유럽이 쥐게 됐다.

유럽 상인들은 군사력을 앞세워 국제 무역항로에서 경쟁자들을 밀어냈다. 자본가들은 아프리카와 인도 등 여러 지역에서 대규모 면화 농장을 건설해 노예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초기 자본주의에서 돈과 힘을 지닌 이들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유럽의 교역 네트워크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애초에 훌륭한 상품을 좋은 가격에 공급해서가 아니라 경쟁자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세계 여러 지역에 고압적인 유럽 상인들이 존재한 덕분이었다.”

저자가 말한, ‘전쟁자본주의’의 탄생이다. 공장이 아니라 들판에서 번성했으며 기계가 아닌 토지에 집중된 자본주의였다. 자유노동보다는 노예노동에 기반했고 계약보다는 폭력과 신체적 구속을 이용했다. 국제적 면화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면화를 효율적으로 대량생산하려는 인간의 욕구는 18세기 산업혁명을 불러왔다는 것. 저자의 말대로 “산업혁명의 전제조건은 전쟁자본주의의 재빠른 포용”인 셈이다.

계몽주의, 과학적 합리주의, 선진제도를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는 신화의 민낯이 실은 이처럼 추악함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면화를 재배한 흑인 노동자들은 쇠가죽 채찍으로 맞았고 방직공이었던 여성, 아이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저자는 과거부터 계속된, 면화를 재배하기 위해 벌어진 불평등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면화의 제국#스벤 베커트#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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