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키지 않는 길은 가지 않았다.…‘나는 신성일이다’라는 자존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왔다.”(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별은 끝내 별로 살다 갔다. 평생 창공에 머물며 낙조(落照)를 품지 않은 채. 스스로를 ‘쥘리앵’(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 주인공)이라 여겼던 ‘한국의 알랭들롱’ 신성일(申星一)은 4일 또 다른 하늘, 별들의 고향으로 날아갔다. 향년 81세.
신성일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성일이었다. 꼿꼿하고 강렬했다. 지난해 갑작스럽던 폐암 판정. 모두가 놀라 입을 다물 때도 그는 “그깟 암세포 모두 다 내쳐버리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언론인터뷰가 된 지난달 동아일보의 만남에서도 “할일이 많다. 북한에 있다는 영화 ‘만추(晩秋·1966년)’ 필름을 찾아오고 싶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당대의 아이콘’이었던 고인은 “스스로를 최고로 대접해야 진짜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사에서 첫 월급을 받아 반 이상을 호화로운 하숙집에 밀어 넣었던 그는 자신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스포츠머리’를 유행시켰던 그를 따라 남자들은 이발소에서 ‘신성일 머리’를 주문했다. “배우는 언제나 배우여야 한다”는 신념 아래 일이 없어도 운동을 거른 적이 없었다. 2005년 구속됐을 때 감옥에서도 콘크리트로 만든 역기를 들고, 골프채 대신 3m짜리 빗자루로 하루에 20~30번씩 스윙 연습을 했다. 추운 겨울에도 냉수로 샤워를 해 30대 청년처럼 근육이 잡힌 건강한 몸을 유지했다고 한다.
패션에도 자부심이 넘쳤다. 고인은 본보와의 마지막 인터뷰 때도 와인 빛이 감도는 빨간 스웨터에 실크스카프를 멋들어지게 곁들였다.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선 150만원짜리 돌체앤가바나 청바지를 입고 레드 카펫을 뚜벅뚜벅 걸었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처음부터 스타였다. 1959년 5081대1의 경쟁률을 뚫고 배우의 길에 들어선 그는, ‘영원한 동반자’인 아내이자 배우 엄앵란을 만난 데뷔작 ‘로맨스 빠빠’부터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았다. ‘맨발의 청춘’ ‘초우’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등 찍는 작품마다 저잣거리를 들썩였다.
삶 자체도 세간의 기준과는 결이 달랐다. 1964년 역시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엄앵란과 전격 결혼을 발표했다. 11월 14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두 사람의 혼인식에는 전국에서 35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정작 최무룡 김지미 등 주요 하객은 식장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2층 테라스 얼굴을 내민 신랑신부를 향한 환호는 영국 왕실 예식이 부러울 것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탓일까.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 말 못할 고충도 적지 않았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말했으나 큰 표차를 고배를 마시고 빚더미에 올랐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며 오랫동안 야인 생활을 했다. 식당을 운영하며 남편 뒷바라지를 하던 엄앵란은 “어디 가도 기죽지 말라”며 매일 10만 원식 쥐어주고 내보냈다. 고인은 2000년 대구 동구에서 세 번째 도전 만에 당선됐다.
2011년 발간한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도 논란이 적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솔직했던 그는 이미 고인이 된 한 여배우와의 사랑을 고백한 게 세상의 공분을 샀다. 하지만 그때도 신성일은 당당했다. “난 그녀에게 일생을 빚진 자다. 어떤 비난이 쏟아질지라도 두렵지 않다.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들려드리는 것이 내 의무다.”
그는 마지막까지 신작 영화 제작의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항암 치료를 마친 후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한방과 양방 복합 치료를 받으며 기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최근 감기에 걸린 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다고 유가족이 전했다. 3일 오후 세상은 그의 ‘사망설’로 들썩였지만, 그는 생명의 끈을 쉽게 놓지 않았다. 결국 다음날 새벽 2시반. 거성(巨星)은 마지막 숨결을 거둬들였다.
“나는 자유인으로, 로맨티스트로 살아가고 있다. 젊은 시절 숱한 유혹이나 강압에도 불구하고 권력자에게 무릎 꿇지 않았던 나다. 난 젊은이들에게 ‘정면 돌파하라’고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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