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벌한 전장이다. 조르고, 찌르고, 탐색하고, 속이고, 독을 살포한다. 싸우다 동맹을 맺는다. 구원을 요청하고 대가를 준다. 한데 전장은 고요하다.
전투의 주인공이 나무와 풀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숲은 평화로운 치유의 공간이지만 식물들은 그 안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인다. 일본 시즈오카대 교수인 식물학자가 식물이 환경, 다른 식물, 병원균, 곤충 등과 어떻게 싸우고 협력하면서 살아가는지를 조명했다.
식물의 싸움은 박진감이 넘친다. 책에 따르면 용수(뽕나무과 상록교목) 같은 식물은 원래 있던 식물에 올라타 자라는 전략을 택했다. 덩굴로 나무를 칭칭 휘감으면 원래 있던 나무는 햇볕을 받지 못해 시든다. 나무를 졸라 죽이는 것처럼 보여 교살식물이라고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큰 꽃으로 알려진 라플레시아는 줄기도 잎도 없다. 대신 기생뿌리라는 기관이 포도과 식물의 뿌리를 파고들어가 영양분을 빨아먹는다. 기생식물이다.
지하에서는 화학전도 벌인다. 대부분의 식물은 뿌리에서 다양한 화학물질을 방출해 다른 식물의 싹이 트는 걸 방해한다. 숲의 풍성한 나무들은 이러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강자들인 셈이다.
약자에게는 약자의 생존 전략이 있다. 사막에 사는 선인장, 빙설에 견디는 고산식물은 숲 대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 길가에 우거진 벼과 잡초 가운데는 마치 공기를 압축해 출력을 높이는 터보 엔진처럼 이산화탄소를 압축해 광합성 능력을 비약적으로 높인 것들이 많다.
식물과 병원균의 전쟁은 ‘피가 마르는’ 공방전이다. 식물은 침투한 병원균이 방출하는 특정 물질을 감지해 방어체계를 가동한다. 병원균이 방어체계를 고장 내는 억제인자를 방출해 이에 맞서면 식물은 억제인자를 재빨리 감지해 방어체계가 작동되도록 체계를 수정한다. 그러면 병원균은 다시 새로운 억제인자를 발달시킨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싸움이다. 병원균의 침범을 막지 못한 세포는 스스로 사멸하는 방법으로 식물을 지키기도 한다.
공존과 협력도 한다. 독보리는 네오타이포듐속(屬) 사상균이 체내에 살게 해주고, 균이 만드는 독소는 가축들로부터 독보리를 지켜준다. 콩과 식물은 뿌리혹을 만들어 뿌리혹박테리아가 살도록 하고, 박테리아는 공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흡수할 수 있도록 암모니아로 고정시킨다. 공생이다.
놀랄 만큼 기발한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식물은 보통 독을 생산해 곤충을 물리친다. 하지만 쇠무릎지기라는 식물은 오히려 곤충의 탈피를 촉진하는 성장호르몬과 같은 물질을 만들어 천적인 유충이 빨리 성충이 되도록 돕는다. 유충의 성장 기간을 단축시켜 자신이 먹히는 기간을 줄이는 것이다. ‘빨리 먹고 떨어지라’는 전략이다.
식물은 지금과 같은 지구환경을 만들어낸 존재다. 식물은 약 30억 년 동안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뿜어 오존층을 만들어냈다. 지구에 쏟아지는 자외선이 감소하면서 수많은 생물이 출현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인류가 화석연료를 태워 이산화탄소를 대량 배출하고 기온을 높이는 한편 오존층에 구멍을 뚫어 지구환경을 식물 탄생 이전으로 되돌리고 있다고 꼬집는다. 저자 말마따나 그런 방식으로 다른 생물을 멸종시키고 승자가 되어 인류가 얻을 세계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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