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하순 경기도 안성 원곡면의 농부 이덕순(당시 41세)은 장남 결혼식에 쓸 혼숫감을 마련하기 위해 경성에 왔다가 고종황제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1월 21일 훙거한 나라님이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독이 든 식혜를 마시고 비명횡사했다고?”
이덕순은 일제 흉계에 의한 것이라는 말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성격인 그는 사흘간 경성에 머물면서 세상 물정을 살핀다. 그사이 독립운동 관계자와 접촉하면서 지방에서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린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평범한 사내는 그렇게 독립만세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이정은,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 돌과 몽둥이를 들다
이덕순은 서당이나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게다가 독립만세운동은 혼자 감당할 일도 아니었다. 그는 경성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이 ‘예정대로’ 전개되는 것을 보고 세 차례에 걸쳐 18명의 원곡면 주민들을 경성으로 데리고 갔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百聞不如一見)’고 했다. 원곡면 사람들은 경성에서 만세운동을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해 3월 말, 이덕순은 장남 혼인 잔치와 동리 회갑연 등에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만세운동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동리별로 만세운동 책임자까지 정해졌다. 칠곡리의 이유석(33·서당)·홍창섭(27·농업), 내가천리의 이덕순(농업)·최은식(22·농업·보통학교 졸업), 외가천리의 이근수(31∼32·대서업)·이희용(47·농업 겸 주막업), 죽백리의 이양섭(25·농업) 등이 바로 그들. 원곡면의 대지주도 아니고 명망가도 아닌,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운동 지휘부는 매우 체계적이며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지휘부는 동리별로 이민(里民)들을 규합해 원곡면사무소로 몰려가 산발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곤 했다. 일경이 배치되지 않은 원곡면에서는 면사무소가 유일한 일제 통치기관이어서 만세운동을 비교적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이는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위한 예비적 성격이 짙었다.
드디어 4월 1일, 3·1항쟁이 시작된 지 꼭 한 달이자 음력으로는 3월 1일이다. 이 ‘의미 깊은’ 날에 원곡면의 만세운동 지휘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오늘 밤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저녁 식사 후 다 모이라.”
해는 아직 짧아 어둠이 일찍 깔렸다. 4월 초하루 밤은 달도 뜨지 않아 ‘기습 작전’에도 유리했다. 이윽고 밤 8시, 원곡면 6개 리에서 1000여 명이 외가천리에 있는 면사무소로 삽시간에 집결했다. 당시 원곡면 주민은 4700여 명. 어린이를 빼면 주민 4명 중 1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셈이다.
사람들이 밝혀 든 등불과 횃불이 면사무소를 빙 둘러싸고 밤하늘을 벌겋게 수놓았다. 면사무소는 일거에 시위대에 제압당했다. 시위 주도자 중 한 명인 이유석이 말했다. “면장을 끌어내 국기를 쥐여 선두에 세우고 일동이 만세를 부르면서 양성(면) 주재소로 가자.”(이정은,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시위대가 면장을 앞세우고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고개(현 만세고개)에 이르자, 이덕순 등 각 동리 책임자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불같은 연설을 토했다.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같이 원곡면·양성면 내의 순사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자. 또한 내지인(일본인)을 양성면 내에 거주케 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 내지인을 양성으로부터 구축(驅逐)하자. 제군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성히 활동하라.”(독립운동사자료집 5, ‘3·1운동 재판 기록’)
원곡면 시위 주도자들은 처음부터 순사 주재소가 있는 양성면에 가서 실력 행사를 할 계획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맨손 시위대를 총과 칼, 쇠갈고리 등으로 진압하는 일제의 행태를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힘을 행사해 일제의 통치기관을 무력화하고자 했다. 이제 만세운동은 민족대표, 천도교·기독교 등 종교계, 학생 및 지식층의 손을 떠나 일반 대중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생력까지 갖춘 것이다.
○ 통신망을 차단하라
원곡면 시위대가 나무 몽둥이를 마련하고, 바지에는 작은 돌을 잔뜩 싸 담은 채 양성면으로 들어선 게 밤 10시경.
그 시각 양성면에서도 만세운동이 별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사방에서 올려진 봉화를 신호로 각 동리에서 떼를 지어 시위에 나선 군중은 양성면 동항리의 순사 주재소와 면사무소, 양성보통학교(현 양성초등학교)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막 해산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 성은고개 쪽에서 휘황찬란한 횃불과 함께 원곡면 시위대가 우렁차게 만세를 부르며 다가오지 않는가. 귀가하려던 동리 사람들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 합류했다. 시위대는 2000명으로 불어났다.
원곡·양성 연합 시위대는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 순사부장 다카노 효조(高野兵藏)는 막 한숨을 돌리려던 참에 또다시 주민들이 몰려와 만세를 부르자 위압적으로 해산을 명령했다. 순사부장이 시위 주동자의 이름을 적으려 할 때, 이덕순이 순사부장의 장죽을 뺏어 한 대 후려쳤다. 벌벌 떠는 순사부장을 붙잡아 조선 두루마기를 입힌 뒤 태극기를 손에 쥐게 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게 했다. 시위대에 붙들려 양성까지 온 원곡면장 남길우는 재판정에서 그때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군중은 주재소로 감과 동시에 독립만세를 부르고, 많은 사람들이 투석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순사보(2명)가 도망쳐 나가자 불을 놓았다. … 그들은 그 다음으로 사무실에 방화했다. 군중은 각자 곤봉을 들었고 또한 바지에 작은 돌을 싸 가지고 그곳에 이르러 거의 전부가 투석한 듯하다.”(독립운동사자료집 5, ‘3·1운동 재판 기록’)
주재소를 불사른 군중은 이어 “전선을 끊으러 간다”며 양성우편소로 몰려갔다. 안성읍 방면으로 연결되는 전신·전화 겸용 통신망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도끼에 찍혀 넘어진 전신주 사이로 전선들이 토막 난 채 버려졌다. 시위대는 우편소 사무실에 들어가 사무용품과 일장기를 걷어내 불에 태워버렸다. 면사무소도 무사하지 못했다.
원곡면과 양성면 내의 일본인들도 모두 쫓겨났다. 대금업자, 잡화상 점주 등 일본인 상인들은 집 안의 물건과 가재도구가 불살라지는 것을 보며 피신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한 가지 원칙은 분명하게 지켰다. 사람은 살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본인이건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조선인이건 사람의 생명을 해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안성3·1운동연구소, ‘안성 3·1독립운동’)
자정을 지나 4월 2일 새벽 2시경. 원곡·양성면은 일제 통치기구도, 일본인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해방구가 돼 있었다.(윤우, ‘안성4·1독립항쟁’)
그런데 누군가가 외쳤다.
“다리를 끊으러 가자, 다리!”
외부와의 통신망을 끊은 데 이어 안성읍의 일본 수비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다리를 차단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안성읍에서 양성면으로 들어오려면 안성천의 지류인 한천에 놓인 한 길 반 높이의 다리를 이용해야 했다. 실제로 시위대가 다리를 끊어버리자 일본수비대가 진입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덕순 등 시위 주도자들은 통신망, 도로를 차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철로까지 차단하려는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우리는 무기가 없고, 적은 무기를 갖고 있으니까 철도 침목 핀을 뽑아버리면 군대를 막을 수 있다. 하려면 철저히 하자. 하다 말면 개죽음당한다.”(최은식의 형수 노부귀 증언, ‘안성 3·1독립운동’)
그러나 4월 2일 아침 원곡면에서 서남쪽으로 7km 떨어진 평택의 경부선 철도를 차단하려는 계획은 무산됐다. 중무장한 일본 수비대가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원곡면 시위대는 급히 피신해야 했다.
○ 피가 진동한 보복
기자는 당시 4월 1일 밤과 2일 아침에 걸쳐 ‘이틀의 해방’을 맞았던 안성3·1항쟁지를 찾았다. 안성은 일제가 황해도 수안, 평북 의주와 함께 ‘3대 폭동지’로 지목할 정도로 격렬한 항일기지였다. 일제가 민족대표 33인을 내란죄로 엮기 위해 폭동 근거로 든 곳 중 하나가 바로 안성이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이어주는 만세고개에 들어서자 3·1만세운동을 기리는 ‘안성 3·1운동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세고개는 원곡면 시위대가 양성으로 진격할 때 연설과 결의, 무장 준비를 했던 역사적 장소다. 기념관 입구에는 ‘만세고개’라고 명명한 기념 석비와 함께 ‘이곳을 지나가는 겨레여/잠시 길을 멈추고/이 만세소리를 들으소서’(조병화, ‘이 만세소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
“일제 통치기관을 내쫓는 행위가 무모한 게 아니었냐고요? 3·1운동이 발발한 후 한 달간 일제는 폭압적으로 진압하면서 이미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낸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군경의 발포 명령까지 떨어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안성 사람들은 목숨을 내놓고 정당한 실력 행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잠시 동안이지만 일제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는 승리를 거둔 거예요. 양성·원곡면의 항쟁은 우리 겨레의 꺾이지 않는 정의감과 애국심을 보여준 의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안성4·1항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당시 ‘실력행사가 무리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태수 안성3·1운동기념관장은 이렇게 의미를 강조했다. 3·1운동 당시 원곡면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봉현(7년 구형)의 손자이기도 한 김 관장은 “3·1운동의 ‘3대 실력 행사’ 지역 중 재판에 기소된 인원으로 보면 안성이 127명으로 수안(71명), 의주(2명)보다 월등히 많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성공한 실력 행사 지역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11월 13일, 기자가 안성3·1운동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마침 독립운동 유공자와 유족들로 구성된 광복회(회장 박유철)가 모임을 열고 있었다. 행사장에서 만난 이경우 광복회 안성지회장과 함께 양성면을 거쳐 안성읍(안성 시내)으로 이동했다. 안성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 지회장은 “원곡·양성 등 서부 지역뿐만 아니라 중부 지역의 안성읍, 그리고 동부 지역의 일죽면, 죽산면, 이죽면, 삼죽면 등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며 남아 있는 유적을 안내했다.
그중 안성경찰서가 있던 안성읍내에서도 3월 하순 이후 만세운동은 끊이지 않았다. 원곡·양성면의 대규모 시위 하루 전인 3월 31일에는 변매화 등 안성기생조합 기생들이 시위를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3000명의 군중이 밤늦게까지 읍내 안성군청과 경찰서, 안성면사무소를 돌아다니며 등불 행진을 했다. 그 이튿날인 4월 1일에도 500명 규모의 만세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 일본 헌병의 발포로 안성읍 시위대 2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일경은 안성읍내의 시위를 막느라 원곡·양성 쪽으로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일제는 4월 3일부터 군대, 그것도 보병부대(조선주차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를 세 차례에 걸쳐 투입하고 나서야 겨우 안성의 만세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후 일제의 보복은 가혹했다.
일경은 시위 주동자들의 집을 모두 불태워 없앴다. 야간 수색까지 벌여가며 피신한 시위 참여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검거가 부진하자 기만책까지 썼다. 일경은 원곡면장을 내세워 ‘농사철임을 감안해 경찰서장의 연설을 듣고 나면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사면해 농사를 짓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6세 이상 60세까지 남자들은 4월 19일 원곡보통학교 뒷산에 모이도록 설득했다. 시위 참여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이를 믿었다. 그러나 당일 지정 장소에 모이자 군인들이 이들을 포위했다. 이어 일경과 헌병들이 참나무를 베어 만든 몽둥이로 무조건 때리고, 저항하거나 도망치는 사람에게는 총까지 쏘았다. 일부는 상투를 묶인 채 30여 리 길의 안성경찰서까지 질질 끌려갔다. 시위 주동자들도 대부분 체포됐다.
경찰서에서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를 당해 숨진 사람들도 속출했다. 원곡·양성면의 희생자는 현장에서 순국한 3명, 부상해 순국한 7명, 경찰서에서 순국한 5명,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한 9명 등 24명에 이르렀고 127명이 옥고를 치렀다. 그뿐만 아니라 시위 중 불에 탄 일제 재산에 대한 배상금으로 무려 1만1000원(당시 쌀 한 가마 3원)을 시위자들에게 부담시켰다.
“가장은 서대문감옥에 갇히고 아녀자가 산에서 나무를 해다 20리 장에 파는 등으로 10여 년에 걸쳐 배상금을 내는 기막힌 일까지 벌어졌다.”(윤우, ‘안성4·1독립항쟁’)
기자는 취재 일정을 마치고 안성의 광복회 사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안성시 보훈회관 건물의 국가 유공자 단체를 소개하는 안내판에 광복회이름이 끝자락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눈에 걸렸다. 보훈회관을 지원하는 시 관계자는 “각 단체 간 상호 협의에 따라 사무실이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워지도록 희생하고 밑거름이 된 항일독립운동가들에게 맞는 예우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광복회가 시위에 나섰을 때 일본인들도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했던 한 광복회 간부의 말이 생각났다. 항일투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갖고 있는 광복회의 무게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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