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소병진 소목장(왼쪽)과 김준 오디오 명장은 한목소리로 “장인이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것은 독선”이라며 “전통과 현대의 협업을 통해 전통 문화유산 속에 최고의 아름다움과 기술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모두 목수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직접 만든 연과 팽이, 스케이트는 늘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가구공장을 운영하던 8촌 형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55년이 지났고,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小木匠)이 됐다.
#2. 스무 살, 입시지옥을 견디고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청년은 우연히 길을 가다 흘러나온 사라사테의 ‘치고이너바이젠’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잊고 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졸업 후 대우전자 중앙연구소에서 오디오 담당 엔지니어로 최고의 소리를 만들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다. 10년 전부터 독립한 이후 우리나라 전통 한지(韓紙)로 ‘콘(진동판)’을 만들어 내는 오디오 명장이 됐다.
소병진 소목장(68·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과 김준 오디오 명장(60)은 살아온 경로와 관심사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전통 가구와 오디오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는 점. 이들이 함께 뭉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달 9일부터 15일까지 전북 전주시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열린 ‘헤리티지 사이언스를 만나다’ 전시회에서는 전통문화의 디자인과 현대적 기술이 합쳐진 독특한 작품 수십 점이 공개됐다. 그중에서도 소병진 소목장과 홍춘수 한지장(80·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 김준 명장이 협업해 만든 ‘평판스피커’는 놀라움을 자아냈다.
정윤석 옹기장(국가무형문화재 제96호)과 김준 오디오 명장 등이 함께 제작한 옹기 스피커. 온고 제공백두산 자락에서 자라나는 600년 수령의 홍송(紅松)을 오디오의 외벽에 해당하는 평판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닥나무 한지를 오디오의 소리를 내는 핵심 부분인 콘으로 사용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스피커를 만들어낸 것이다.
선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러나 이들은 “답습하는 전통만으로는 미래가 없다”는 기치 아래 힘을 모았다. 전통 문화유산의 현대화·세계화를 모색하는 소병진 소목장과 김준 명장을 2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소목장은 3명에 불과해요. 평생을 바친 덕분에 제가 만든 전통 장롱 등을 찾는 분들이 여전히 많죠. 하지만 늘 세계에 우리의 전통을 알리고 싶은 갈망이 있었어요. 아무 조건 따지지 않고, 협업에 나선 이유입니다.”
소 소목장은 국내 유일의 조선 왕실 가구를 재현하는 전통 기술을 보유한 장인이다. 하지만 그는 정체돼 있는 국내 전통시장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전통 문화재 역시 세계화가 되지 않으면 사장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오디오처럼 실생활에서 충분히 사용 가능한 가구였다.
소병진 소목장, 홍춘수 한지장, 김준 명장 등이 협업해 만든 평판 스피커. 온고 제공“글로벌 오디오 시장에서는 독일의 클랑필름이나 미국의 웨스턴일렉트릭 등에서 1920년대에 만든 작품들이 명기로 여겨지고 있어요. 소리를 내는 핵심 부분인 콘을 서양식 펄프 등을 사용해서는 그들을 절대로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우연히 한지에서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섬유 조직이 길어 소리가 섬세하면서도 고음과 저음을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는 한지야말로 오디오 시장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핵심 열쇠인 거죠.”(김준 명장)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이탈리아 밀라노 트리엔날레 관계자들이 참석해 내년도 이탈리아 현지 전시를 의뢰하는 등 해외 전문가들의 호응이 컸다. 소 소목장은 “전통의 기법과 정신은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며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는 전통이어야 살아있는 문화유산이 된다는 것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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