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캐스린 H 앤서니 지음·이재경 옮김/452쪽·1만9800원·반니
“우리의 권리를 알고 살자. 디자인은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지만 디자인에는 우리의 삶을 변질시킬 힘도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매일 디자인에 의해 차별당할 수도 우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디자인에 의해 정의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곧장 결론부터 까서 죄송. 하지만 굳이 책 끄트머리에 있는 글귀를 먼저 쓴 이유는 간단하다. 이게 이 책이 말하고 싶은 ‘전부’이기 때문이다.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인 저자는 괜한 학술적 장광설로 시간을 끌지 않는다. 투사(鬪士)로 변신해 직구로 내리꽂는다. 세상을 둘러싼 디자인, 싹 뜯어 고쳐야 한다고.
원서 제목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좀 길긴 한데, ‘디자인으로 정의(혹은 규제)되는: 일상의 상품과 장소에 숨겨진 성과 연령, 육체에 대한 편견의 놀라운 힘’ 정도 되겠다. 그니까 우리가 무심코 마주치거나 익숙하게 사용하는 많은 것이 실은 약자나 소수를 차별하고 있단 소리다. 나중에 책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거의 모든 것’을 거론한다.
하이힐이 성차별적이고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건 알 만한 얘기. 높지만 근사한 침대도 아이나 병자가 추락할 가능성이 큰 나쁜 디자인이다. 오른손잡이에 맞춰져 있는 학교 책상, 좁고 불편한 비행기와 버스 통로, 좌석도 마찬가지. 소비자를 고려하지 않는 배달 포장과 운동선수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 용품, 환기가 원활하지 않은 지하 쇼핑몰…. ‘생산자’와 ‘다수’의 이익에만 부합하는 디자인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이쯤 되면,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도 바꿀 필요가 있다. 흔히 디자인은 보기 좋게 만들어 “소비자와 고객을 유혹해서 더 많은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쓰게” 하는 거라 치부한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와 우리 가족에게 유리한 세상, 지금보다 안전하고 행복하고 편안한 세상을 만드는” 일이 디자인이라고 명명한다. 나이나 성별, 피부, 체형 때문에 피해를 본다면 그건 제대로 된 디자인이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이 책은 ‘투사’의 글이다. 사소한 것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걸고넘어진다. 공중화장실의 성평등 문제에 상당 분량을 할애했는데, 저자는 실제로 2010년 미 의회 청문회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해 변화를 이끌어 낸 바 있다. 이런 이들 덕분에 세상이 바뀌는 거 아니겠나. 고마운 인물이고, 고마운 책이다.
게다가 ‘좋아 보이는…’은 주장만 나열하지 않고 나름의 대안을 성실히 소개한다. 미 캘리포니아주 라호야 해변의 남녀 중립 화장실이나 학생에게 적절한 온도와 공기를 제공하는 독일 쾰른 발도르프 학교 등을 통해 디자인이 뭘 할 수 있는지 살핀다. 흥미롭게도 서울의 지하철 안전시스템이나 젠더 친화적 공중화장실 등도 좋은 사례로 소개한다.
다만 과하다 싶은 지적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지갑을 뒷주머니에 넣고 앉아 일하다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넉넉한 바지 주머니 탓이라고 말한다. 수긍이 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목소리가 줄기차게 이어지는 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첫 머리글의 나머지 대목을 곱씹어보자. “디자인은 변화를 만들지 않는다. 변화는 사람이 만든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장착한다면 변화는 우리 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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