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없는 눈의 지하철 기관사. 조종실 속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깜빡이는 불빛이 지하철 노선도 위를 빙빙 돈다. 그 배경에 깔린 내레이션은 이렇다.
“서서히 끓어오르는 냄비 속 개구리는 온도가 높아지는 걸 모른다.”
이 작품은 제51회 시제스 국제영화제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고상을 수상한 김상준 감독(32)의 ‘바퀴 돈다’. 시제스 영화제는 스페인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장르 영화제다. 데뷔작으로 한국인 최초 수상의 쾌거를 이룬 김 감독을 최근 서울 마포구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바퀴 돈다’는 도시인이 지쳐가다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가고, 몸이 개구리로 변하자 영혼이 되돌아오기 위해 애쓰는 내용을 담았다. 도시인들에게 “깨어나라”고 외치는 듯한 이 작품은 공상과학적 설정에 인간적 드라마를 결합해 호평을 받았다. 김 감독은 “시상식에서 만난 심사위원이 ‘의심의 여지 없이 최고였다’며 어깨를 쳐줬다”고 했다.
이 작품은 영화 ‘그래비티’를 제작한 세계적인 컴퓨터그래픽 회사인 미국 ‘프레임스토어’의 그래픽 아티스트로 일하다 퇴사한 그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아침에 출근해 다음 날 아침 퇴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지하철 차창을 멍하니 보다 터널 속 빨간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봤는데, ‘저기로 가면 원하는 걸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상상에 작품을 시작했죠.”
그는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 출신으로,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특별 전시된 가수 뷔욕(비외르크)의 ‘Lionsong’ 뮤직비디오도 그의 손을 거쳤다.
“뷔욕의 팔다리가 늘어지는 모습이 제 작품이에요.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매니악’에서 피 터지고 내장이 쏟아지는 효과도 제가 했고요. 주로 잔인한 장면을 담당했죠(웃음).”
대학생 때 방학 동안 한국에서 김지운 감독의 영화 ‘인류멸망 보고서’의 연출부 막내로 일한 그는 오래전부터 자기만의 작품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바퀴 돈다’를 준비한 것도 한창 일하던 때인 6년 전이다. ‘밤샘 작업과 병행해 힘들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힘들수록 정신적 보상을 위해 내 일을 더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시제스 영화제 수상작은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에 출품될 자격을 갖게 돼 ‘바퀴 돈다’의 오스카 진출도 기대해볼 만하다. 김 감독은 “정말 기쁜 일이지만 일단 차기작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은 ‘시선’으로 삭막한 도시에서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1, 2년 안에 완성할 예정인데 한국에도 빨리 선보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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