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전쟁터로 떠날 남자들은 신체를 바늘로 찔러 문신을 새겼다. 가족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일심(一心) 등을 새기던 이 풍습은 6·25전쟁이 발생했던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고향을 떠나 위험한 지역으로 나갈 때, 죽어서 시신으로라도 고향에 돌아와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이다.
‘장마’ ‘완장’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으로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소설가 윤흥길(76)이 등단 50주년인 올해 신작 장편소설 ‘문신’(총 5권·문학동네·각 1만4300원·사진)을 내놓았다. 18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20여 년 전 ‘한국인의 의식구조’란 책에서 부병자자에 대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 사이에선 ‘밟아도, 밟아도 죽지만 말아라’라고 개사한 아리랑 민요가 불리었어요. 우리 민족이 가진 치열한 귀소본능을 보여주는 아리랑 민요와 부병자자 풍습이 소설의 모티프가 됐습니다.”
소설 ‘문신’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천석꾼 대지주 최명배 일가가 각기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혼란하고 폭력적인 시대를 살아내는 이야기다. 창씨개명, 황국신민화 등 시대적 사건도 나오고, 광복 이후까지 한 가족의 엇갈린 욕망과 갈등을 그려냈다. 지난해 건강상 집필을 잠시 중단했던 탓에 1∼3권이 먼저 나왔다. 나머지 두 권은 내년 상반기 출간 예정.
윤 작가는 “글로벌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작품을 내놨지만, 우리가 거쳐 온 과거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단 생각에서 ‘낡은’ 주제를 다뤘다”고 말했다. 특히 토속적인 문장과 어휘 선택, 수사법에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전라도 판소리의 정서와 율조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요즘은 우리 고유의 것을 훼손하는 TV 자막이 많아요. 그걸 보며 한국인의 정체성과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내는 문장으로 소중한 우리 것을 지키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됐어요. 우리 것을 완전히 되찾을 순 없어도 잊진 말자는 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윤 작가에 따르면 현재 한국 문학계는 “모노컬러 패션이 유행하는 거리처럼 단순하고 가벼운 이야기 중심”이다. 이런 현상은 “문학을 왜소화하고 궁핍화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인생과 세상을 모두 포용해야 할 문학이 스스로 그릇을 작게 만들고 있어요. 다양한 문학 형태가 공존해야 그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과 풍토의 바로미터가 된다는 점에서 남들이 추구하지 않는 쪽을 내 나이에 맞게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연신 스스로 “작가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며 겸손해했다. 그 대신 젊은 시절부터 모자라는 재능을 한탄할 게 아니라 노력으로 보충하겠단 마음으로 상상력 연습을 하곤 했다. 평소 국어사전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취미도 있다. 그는 “이번 작품을 내년 상반기에 탈고한 뒤엔 손자·손녀에게 들려줄 동화와 한지 생산지인 전북 완주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쓰려고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설 ‘문신’엔 독자들 눈치 볼 것 없이 내 고집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으려 했어요. 일단 미지의 독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고 안 잡고는 이제 독자들에게 달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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