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가을은 어디나 낙엽이다. 늦은 오전에 쓸어놓고 오후 서너 시가 되면 가게 앞은 다시 낙엽으로 가득해진다. 신촌에 있던 서점을 혜화동으로 옮긴 후 처음 정 붙인 게 낙엽이었다. 내가 시인이라서, 운영하고 있는 곳이 시집서점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 십상이겠지만 낙엽을 좋아해본 것도, 낙엽 쓸어내는 일에서 기쁨을 느낀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말이 나온 김에, 시인이란 자연만을 숭앙하며 그것만을 좇는 사람들이라는 오해는 언제쯤 사라질까. 물론 지경과 경지의 장면 앞에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들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무튼, 그 좋아하던 낙엽 쓸기도 끝나고 말았다. 구청 소속 커다란 사다리차가 와서 뭉텅뭉텅 가지를 쳐버렸기 때문이다. 나무의 맨몸 위로 초겨울 하늘만 가득해졌다.
내가 운영하는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은 생긴 지 2년 반이 된 작은 서점이다. 시집만 판매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시와 관련된 서적들도 조금 있다. 처음 2년은 신촌에 있는 카페 한 귀퉁이에 세 들어 운영하다가, 올 11월 이곳 혜화동으로 이사했다. 나선계단 아래층에는 1953년에 생긴 동양서림이 있다. 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신간 판매 서점으로 알려져 있다. 단골들로 유지되는 오래된 서점과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작은 서점의 협업으로 각자의 활로를 찾아보자는 일종의 의기투합이다.
함께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난 셈이지만,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동양서림에는 눈에 띄게 젊은 독자들이 많아졌고, 위트 앤 시니컬도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들이 찾아오는 서점이 되었으니까.
오늘은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손을 꼭 붙들고 위트 앤 시니컬에 찾아왔다. 한참 고르고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은 것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였다. 이래저래 먹먹해져서 “좋은 시집을 고르셨네요” 했더니 “엄마한테 혜화동으로 위트 앤 시니컬이 이사 왔다고, 같이 가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시집을 한 권 선물해 준다셔서요” 하고 대답한 사람은 딸. 지긋한 연세의 어머니는 말씀 없이 웃으신다.
나이 들어가는 엄마와 아직 젊은 딸이 허수경의 시집을 선물로 주고 받는, 이런 멋진 풍경을 보고 싶어서 서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또한 이것이 오래된 동네 혜화동만의 묘미 아니겠는가. 그들을 따라나서 문 앞까지 배웅했다. 낙엽을 잃은 플라타너스 나무 위로 하늘이 흐리다. 눈이라도 올 모양이지. 이제 눈을 쓸어낼 채비를 해야겠다. 어쩐지 그 일에도 정을 붙일 것 같다. 문득 이 골목 많은 동네로 이사 오길 잘했다고도 생각했다.
●‘위트 앤 시니컬’(서울 종로구 창경궁로·혜화동)은 2016년 6월 문을 연 시집 전문 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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