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 서울 중구 광희동2가 건물 신축 현장. 그저 지상 4층짜리 건물 같은데 가림막 너머로 보이는 외관이 독특했다. 솔방울을 연상케 하는 회색 역삼각형이다.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짤 때 쓰는 깔때기를 여러 개 겹쳐 놓은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작업이 한창인 내부도 여느 매장처럼 꾸며지는 1층을 빼고는 평범함과 거리가 있었다. 2, 3층에는 언뜻 봐서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각종 대형 장비들이 파란색 비닐에 싸여 있었다. 이곳은 도심에서 참기름과 들기름을 생산하는 스타트업 쿠엔즈버킷 새 사옥. 비닐 속 기계는 업체 대표 박정용 씨(49)가 독일 업체와 손잡고 개발한 기름을 짜내는 착유(搾油) 설비다.
“창업 후 6년간의 생산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존에는 수평 방식이던 착유 장비를 수직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좁은 대지 면적에도 장비를 설치할 수 있도록 개선한 겁니다. 땅값이 비싼 도심에서는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쿠엔즈버킷 신사옥은 제조·생산 시설뿐만 아니라 매장과 문화공간을 한데 모은 형태로 짓고 있다. 1층에서는 제품을 판매하고 4층은 요리 강습 등을 할 수 있는 요리체험장으로 꾸민다. 옥상은 문화공간으로 조성한다. 제조와 판매를 한곳에서 가능하게 해 유통 단계를 최소화하고 제품 신선도를 확보하면서 외국인 관광객 유치 효과까지 보겠다는 전략이다.
2013년 강남 역삼동에서 시작한 쿠엔즈버킷은 참깨나 들깨도 커피 원두나 와인용 포도처럼 섬세한 식품이라고 주장한다. 국내 한 농가와 계약을 맺고 품종부터 품질 검사까지 마친 참깨와 들깨를 가져다 만든다. 기름을 짜내는 방식도 다르다. 기계 압착 이전 맷돌로 짜내던 방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는 취지 아래 올리브유를 만들 때 쓰는 저온 압착 방식을 개량했다. ‘로스팅’과 ‘필터링’이 다르다 보니 처음 맛보는 참기름, 들기름 맛이 난다.
창업 초기에는 하루 한두 병을 파는 정도였지만 차츰 입소문이 나면서 국내 주요 백화점과 홍콩 수입 식료품 판매점 ‘시티슈퍼’, 미슐랭 3스타 등급을 자랑하는 미국 뉴욕의 레스토랑에도 공급하고 있다. 올해 매출은 20억 원에 육박한다.
박 대표는 “인구 증가 등으로 도시가 외곽으로 점점 팽창하면서 ‘동네 두부집’ ‘동네 어묵집’으로 대표되는 가게들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전통을 지녔던 동네 가게들이 도시 바깥으로 아예 밀려나게 됐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식품의 품질과 다양성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지금, 도심의 식품 제조업체들도 이에 부응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박 대표는 “일본의 동네공장(町工場·마치코바) 시스템을 연구해 보니 도심에서도 전통이 흐트러지지 않는 가게가 적지 않았다. 특히 도심 양조장 등을 보며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단가나 생산량에 집중하기보다는 고유의 특성을 가진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 눈높이와 취향을 만족시켜야 도심 제조업이 부흥할 수 있다는 것.
서울시 소공인 지원정책도 박 대표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한 패션·봉제 업체의 상품에 ‘메이드 인 서울’ 브랜드를 부여해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계획이 대표적이다. 박 대표는 “우리가 만든 기름이 ‘도심 방앗간 제품’으로 자리 잡게 되면 제품뿐만 아니라 ‘도심 공장’ 방식도 수출할 수 있다고 본다. 도심에서 소비자와 함께 호흡하며 성공을 거두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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