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물고기는 몸길이가 삼십 리를 넘는다. 등에 모래가 쌓이면 떨어뜨리려고 바다 위로 올라온다. 이때 뱃사람들이 섬이라 생각해 배를 가까이 대면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면 파도가 거칠어져서 배가 이 때문에 부서진다.”(‘회본백물어·繪本百物語’에서)
메이지 유신 직후, 근대화 물결이 밀려오던 일본. 무역회사 회사원인 사사무라 요지로 일행은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 나누길 즐긴다. 주로 믿기지 않는 괴담을 소재로 얘기꽃을 피우지만 옥신각신하기 일쑤. 결국엔 젊은 시절 방방곡곡을 여행했던 은거 노인 잇파쿠 옹을 찾아가 해답을 구하곤 한다. 그때마다 잇파쿠 옹, 아니 야마오카 모모스케는 놀라운 경험담을 들려준다.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를 일컫는 ‘항설백물어(巷說百物語)’ 시리즈 3편에 해당하는 이 책은 얼핏 봐선 다소 잡스러워 보인다. 실제로 에도시대 기담집인 ‘회본백물어’를 소재로 했으니 뻔한 귀신 얘기 수준이 아닐까 하는 선입견이 앞선다. 등장하는 내용을 봐도, 웬만한 섬만큼 크다는 ‘붉은 가오리’나 멧돼지를 맨손으로 잡아먹는 ‘산 사내’가 등장하니 지레짐작이 맞다 싶을 정도. 하지만 현지에서 “민속학과 종교학을 아우르는 천재”라 불리는 작가의 작품이 거기서 멈출 리 없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단편처럼 엮인 이 책은, 일단 기본적으로는 사사무라 일행이 야마오카 영감에게 듣는 진기한 체험담 형식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그가 들려주는 얘기는 황당하면서도 왠지 있을 법한 구석이 많다. 게다가 그 속엔 인간의 심연을 꿰뚫는 냉정한 칼이 숨겨져 있다.
제130회 나오키상을 받을 때 가장 극찬이 쏟아졌다는 에피소드 ‘붉은 가오리’를 보자. 위에서 언급한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가 진짜 존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야마오카가 경험한 미지의 섬엔 육지와 수백 년째 인연이 끊긴 사람들이 모여 산다. 일종의 신정국가가 돼버린 그곳은 ‘섬 아버지’가 죽으라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불길로 뛰어드는 백성들이 있다. 그냥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대로 살아가는 이들은 어떤 감정을 겪고 있는 걸까. 그리고 모든 걸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왕이자 신은 과연 행복한 걸까. 그 섬은, 언제 물 밑으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물고기 등보다 뭐가 나은 걸까.
‘항설백물어’ 시리즈는 어딘가 모르게 ‘아라비안나이트’가 떠오른다. 목숨을 걸고 밤마다 만담을 해야 했던 셰에라자드의 비장함이야 없겠지만, 천변만화하는 스토리 속에 푹 빠져들다 보면 날 새는 줄 모를 법도 하다. 특히나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이라 그런지 더욱 감칠맛이 풍부하다. 게다가 의외로 현실감도 넘쳐서, 오히려 ‘홍콩 할매’ 같은 밑도 끝도 없는 괴담을 기대한 이라면 실망할 터. 전작을 읽지 않았어도 별 상관없단 것도 장점이라 하겠다. 다음 편은 언제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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