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느끼고 배우고 깨치려 찾는 어두운 역사의 현장답사다. 굳이 벽두부터 흑(黑)역사 현장으로 이끄는 이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고언(苦言)에 대한 경각이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민족자주정신의 고양이란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 하지만 아쉬움도 그렇다. 그런 장거(壯擧)가 경술국치(1910년), 을사늑약(1905년), 강화도조약(1876년)에 있었어야 했기에.
메이지 유신 150주년이던 지난 한 해, 일본의 거양은 전국적이었다.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의 칼날을 시퍼렇게 세워 무엇이든 벨 준비를 갖추던 시절. 그 시작은 1853년 도쿄만에 출현한 흑선(미국 페리 제독의 함대)이었다. 외세로 촉발된 대내외 환난에 막부는 흔들렸고 ‘대양이’(大攘夷·우세한 서양의 실력을 배워 그 기술로 나라를 넘보는 서양을 제압하자는 전략) 개국론으로 무장한 세력은 265년 막부 체제를 몰아내고 새 세상을 열었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엄청난 지식과 기술. 그들은 그걸 조선의 국권과 영토 침탈에 쏟아부었다.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다. 하지만 우리 선택은 소양이(小攘夷·서양이라면 무조건 배척). 그나마도 대원군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글쎄, 운요호사건(1875년)으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1876년)은 맺지 않았을 수도…. 내가 야마구치현 하기(萩)시를 찾은 건 이런 회한에서다. 그런 상황을 유신으로 이끌고 일본을 근대화시켜 작금에 이르게 한 조슈(長州)번의 발자취를 좇아서다.
당시 주역은 지금도 영웅시된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겐 통한의 침략자다. 그로 인한 고초와 환난은 지금도 엄연. 그렇다고 백안시만 할 순 없다. 영웅시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걸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고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메이지 유신 주역의 그런 강기(剛氣)가 요구될 것이다. 수레바퀴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 지혜와 더불어. 그런 그들을 아는 것, 그게 곧 우리를 아는 길이다.
혼슈와 규슈 두 큰 섬 사이는 650m(간몬 해협). 거길 간몬대교가 잇는데 혼슈 최남단 시모노세키(下關·야마구치현)와 규슈 최북단 모지(門司·후쿠오카현)다. 시모노세키는 부산항 왕복 부관페리의 출항지. 복어로 이름난 곳이다. 그런데 그 복어는 여기 것이 아니다. 일본 전국서 온다. 여기서야 가장 좋은 값을 받아서다. 그 배경, 여기가 세토나이카이 해운의 관문이라서다. 히로시마 고베 오사카(세토우치), 더 나아가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까지 이어지는 뱃길 출발지다.
야마구치현에 들어서자 잘 아는 얼굴이 보인다. 아베 신조 총리인데 곳곳의 선거벽보에 대문짝만하게 든 사진이다. 여기가 지역구임과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한 조슈벌(長州閥·일본 정치경제계를 장악한 야마구치현 출신 인사집단) 본토임을 웅변한다. 그의 집안을 들여다보니 외고조부(오시다 요시사마)가 ‘대양이’ 주창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의 외부 문하생이라 한다. 시내엔 조선통신사 숙박지와 더불어 ‘일청강화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1895년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을 불러 청일전쟁 전쟁배상금을 요구한 회의장이다.
당시 요정이던 여긴 ‘조형의 규범이 되는 건물’이라 문화재가 됐다. 안에는 당시 회의장이 그대로 전시 중. 그런데 ‘청일강화조약은…조선 독립의 확인이 약속됐다’는 문구가 거슬렸다. 그건 미필적 고의의 오해 도발 문구다. 그게 조선 강점에 앞서 청나라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악의적 조처란 걸 모르는 이에겐 ‘평화협정(Peace Treaty)’이란 이름 아래 일본이 조선에 베푼 시혜로 해석될 수밖에 없어서다.
하기(萩)는 에도 시대 조슈번의 성도(城都). 삼면은 산, 나머지도 바다(동해)에 에워싸인 삼각주다. 이런 조슈엔 독특한 정서가 있다. 막부를 향한 울분이다. 배경은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동서로 재편된 세력이 천하통일을 두고 벌인 결전이다. 서군 수장엔 혼슈 남단 5개현을 영지로 가졌던 막강 조슈의 다이묘(영주) 모리 데루모토가 정해졌다. 하지만 그에겐 막부 수장의 뜻이 없었다. 그래서 소수만 출병시키고 자신은 오사카에 머물렀다. 승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몫. 패장 모리가(家)는 영지 상당분을 몰수당하고 하기로 쫓겨났다. 막부에 대한 증오심은 이렇게 시작됐고 절치부심은 260여 년을 이어갔다.
그게 조슈번의 메이지 유신 주도 동력. 외세 출현으로 갈팡질팡하는 막부를 향해 조슈는 존왕(왕권 회수)양이의 기치 아래 막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게 개국(開國)양이 주창으로 발전하자 막부는 토벌(1, 2차 조슈전쟁)에 들어갔다. 그런데 결과는 막부 해체. 사카모토 료마가 중개한 삿초(조슈·사쓰마번) 동맹이 대정봉환(大政奉還·왕의 막부통치권 회수)을 이끌어냈다. 메이지 정부는 그 이후의 정치 체제. 그게 조슈 세상인 건 당연했다. 그 역전의 주인공, 낯설지 않다. 이토 히로부미(초대 조선통감), 이노우에 가오루와 미우라 고로(조선공사·명성황후 시해 사건 기획·실행)…. 메이지 유신이 뭔가. 봉건체제 일본을 군국·제국주의 정부로 바꾼 혁명이다. 현재 일본의 밑그림이면서. 그런데 그게 우리에겐 식민통치 35년이란 지옥문의 개장이었다. 조슈의 성공, 조선엔 슬픔과 치욕이 됐다.
요시다 쇼인은 그런 변혁의 핵심. 조슈벌의 사상적 아버지이자 일본 우익의 태조다. 대양이는 선견지명이었다. 서양에 대항하려는 사무라이에게 밀항을 권한 것 역시. 이길 방도를 배워야 싸워 이길 수 있음을 가르친 선각자였다. 그는 스스로도 밀항을 기도했다. 그 때문에 수감됐고 옥살이 중 강의로 민초의 정신개벽을 이끌었다. 가석방 후 고향에 차린 숙사(塾舍·기숙학교)를 무대로 청소년의 생각을 혁신시킨 것. 그게 하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다. 그런데 동전의 양면과 같던 조슈와 조선의 운명은 여기서도 엇갈렸다. 조선을 치욕으로 몰아넣은 장본인, 일본 메이지 유신의 황태자가 여기서 태어난 것이다. 다름 아닌 이토 히로부미다.
시모노세키에서 하기까지는 도로로 90km. 동해로 흘러나가는 아부강 두 물줄기가 형성시킨 삼각주 평야의 하기는 한적한 어촌 형국. 육지는 동남북 세 방향으로 산에 갇혔고 트인 서쪽은 동해. 사방이 물과 산에 막힌 터라 도저히 성도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패장에 대한 근신처벌로는 완벽하겠지만. 히로시마를 떠나게 될 때 모리가는 내륙(야마가타시)을 요청했다. 하지만 막부의 결정은 하기. 막부를 향한 원한이 사무칠 만도 하다. 쇼카손주쿠는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거긴 쇼인신사 경내로 성역화된 상태. 그가 일본 군국주의 화신이란 사실을 안다면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신사 대신 여길 찾은 이유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도 세계유산에 등재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하기의 산업화 초기 유산군)이었다. 숙생들이 살던 하기성 아랫마을과 더불어.
쇼인의 학숙엔 청소년이 몰렸다. 신분과 계급을 따지지 않고 받아준 당시 유일한 학교여서다. 그 최대 수혜자는 단연 이토 히로부미다. 아홉 살에 근처로 이사와 그런 행운을 거머쥔 것. 하급무사 아들이란 신분으론 어떤 공적 교육도 받을 수 없었다. 학숙은 13개월(1857년 11월∼1858년 12월) 만에 철폐됐다. 쇼인이 처형된 탓. 하지만 그 영향은 지대했다. 근대화 기수가 양산돼서다. 가장 탁월했던 인물은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사무라이 계급만이 군인이던 그때 평민군대 기헤이타이(奇兵隊)를 조직해 조슈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막부를 끝장낸 혁명아다. 하지만 그 역시 조슈-조선의 엇박자 운명의 기수였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의 롤 모델이 돼서다. 그 고리는 1863년 시모노세키 전쟁(조슈번의 서양 함대 대포 공격) 이듬해 열린 영국과 강화협상. 영국 유학 중 급거 귀국한 이토는 막부 대표였던 그의 통역을 맡았다. 그의 인물됨에 감화된 이토는 기헤이타이에 참가했고 조슈전쟁 참전을 통해 메이지 정부에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또 한 사람의 조선 공적(公敵)이 탄생했다. 전쟁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기헤이타이 포대장 미우라 고로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경복궁에 불을 지른 조선공사다.
그들이 ‘여우사냥’이라 불렀던 이 참극. 이토 히로부미와 쇼카손주쿠에서 알게 된 절친 이노우에 가오루에 의해 기획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외무대신 이노우에를 세 직급 아래의 조선공사로 발령하며 조선 침탈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이노우에는 조선을 떠나며 후임 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황후 시해 계획을 사주했다. 두 절친은 영국영사관 방화사건(1863년)도 함께 저질렀다. 후사가 없던 이들은 이노우에 형의 3, 4남을 나란히 양자로 들일 정도로 친밀했다고 한다.
쇼카손주쿠 숙생의 일본 군국주의 기여에선 기헤이타이 총독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메이지 정부의 징병제(1873년) 도입 등 군사체제 근대화에 앞장선 인물(제국육군원수·내각총리 2회 역임). 그게 일본 육군의 모체가 돼 ‘일본 군국주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것만으로도 쇼카손주쿠가 개화기 일본에 공헌한 바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된다. 내각에 진출한 이토 히로부미는 학교령으로 교육개혁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징병제로 군국주의 체제를, 다카스키 신사쿠는 기헤이타이를 통한 막부 타도로 메이지 유신 길을 틔웠다. 하기는 그 모든 것의 산실. 쇼인의 생가 터와 무덤·동상, 다카스키 신사쿠 집터와 동상, 이토 히로부미의 집이 쇼인 신사 주변에 산재한다.
●여행 정보
찾아가기: ◇시모노세키: 모지항(기타큐슈시·후쿠오카현)에서 보트로 간몬 해협을 건넌다. 도착항은 가라토(터미널·시모노세키수족관). 후쿠오카 덴진 버스센터∼고쿠라(기타큐슈시)∼모지코 ◇하기 ▽노선버스: 시모노세키(가라토)∼우베∼야마구치·우베공항∼신야마구치(산요신칸센역)∼유다온천∼하기(시청) 6시간 9분 소요(갈아타기에 드는 2시간 15분 포함) ▽철도+버스: JR산요신칸센(하카타∼신야마구치) 35분, 버스(신야마구치∼히가시하기역) 1시간 10분. 산큐패스(SunQ Pass): 북부 규슈 3일권(7000엔), 규슈 전역 3, 4일권(1만, 1만4000엔)은 시모노세키를 포함해 야마구치현 일부 지역 노선버스에도 통용된다. 모지코↔가라토 터미널 보트 탑승도 물론. 산큐패스를 가장 저렴하게 파는 곳은 디스커버리 규슈. 패스 이용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규슈타비.
하기(萩): 도시가 크지 않고 한적해 자전거를 빌려 여유 만만하게 돌아보기를 권한다. 히가시하기역 앞에 대여점. 시간당 200∼350엔(하루 1000엔). 순환루트 마루버스(거리 무관 1회 100엔)가 30분 간격으로 운행(동·서 루트). 하루 무제한 이용권은 500엔. ◇콤비네이션 티켓: 조카마치(城下町) 이토 히로부미 저택 등 유료 입장 9곳 통합이용권(310엔). 구입은 매표소에서. 쇼인신사(쇼카손주쿠), 다카스키 신사쿠 집터(동상), 쇼인 무덤과 생가 터(동상)는 무료 입장. 저팬가이드닷컴(영어)
간지마벳소(鷹島別邸): 지류가 아부강에 유입되는 합수 지점의 수변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고급 료칸(하기온천·Hagi Hakkei Ganjima Besso). 모든 객실에 로텐부로 설치. 아부강, 운하 조망 객실 선택. 히가시하기역에서 도보 8분. 야마구치현 하기시 진토 3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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