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화가의 발칙한 조수 연기 “스승이 소리칠 때 짜릿한 희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9일 03시 00분


연극 ‘레드’에서 화가 마크 로스코의 조수 ‘켄’을 연기한 박정복(왼쪽), 김도빈. 두 배우는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객석까지 닿도록 늘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연극 ‘레드’에서 화가 마크 로스코의 조수 ‘켄’을 연기한 박정복(왼쪽), 김도빈. 두 배우는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객석까지 닿도록 늘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거장 마크 로스코가 화실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 지를 때 가장 짜릿해요. 매일 더 큰 호통 소리를 듣고 싶어 감정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연극 ‘레드’에서 마크 로스코(1903∼1970)의 화실에 조수로 고용된 ‘켄’을 연기하는 박정복(35), 김도빈(37)에게 무대에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로스코 역은 강신일, 정보석이 맡고 있다. 김도빈은 “스승이 ‘네 인생은 저 밖에 있다’고 말하는 순간 울컥하며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스승을 따르면서도 때론 발칙하게 도발하는 캐릭터 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24일 박정복, 김도빈을 만났다.

6일 개막한 후 인기몰이 중인 ‘레드’는 1958년 로스코가 뉴욕 시그램 빌딩 안 고급 레스토랑에 걸릴 벽화 40여 점을 의뢰받은 뒤 돌연 계약을 파기한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 압도적인 대사량과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는 2인극이다. 켄은 가상의 인물로 극중 로스코는 ‘팝 아트’라는 새로운 화풍이 주목받자 본인이 이룬 추상화의 위상이 무너지는 게 아닌지 끊임없이 번뇌한다. 거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어느새 ‘꼰대’가 되어버린 화가 로스코가 켄과 대화하고 팽팽히 맞서며 토론하는 모습을 그렸다.

세 번째 켄을 연기하는 박정복은 “켄이 그림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인물이기에 새로운 배우가 참신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역을 양보해야 하나 고민했다”면서도 “워낙 애정이 많은 작품이라 욕심이 생겼다”고 밝혔다. 처음 켄을 맡은 김도빈은 “공연 때마다 외벽에 큼지막하게 붙은 ‘레드’의 현수막을 보며 동경하던 작품”이라며 “캐스팅 제의가 왔을 때 곧바로 ‘덥석’ 수락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처음 만난 두 배우는 로스코와의 관계 설정이 가장 어렵다고 설명했다. 둘은 틈 날 때마다 배역에 대한 고민을 나누려 자주 통화한다.

“어제도 극 후반부 4장에 대해 논의했어요. 스승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직언하는 내용이 있는데 항상 어려워요. 단순한 대사일 수도 있지만 애증을 담아 연기해야 하거든요”(김도빈)

“스승에 대한 존경과 증오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게 관건이라고 생각해요. 정보석, 강신일 선배로부터 ‘오늘은 좀 무섭더라. 날 죽일 것 같았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만큼 감정선이 미묘하죠.”(박정복)

관객은 쉼 없이 쏟아지는 대사의 양에 놀라지만, 정작 힘든 장면은 따로 있단다. 김도빈은 “거대한 캔버스를 붉은색으로 칠하는 장면에서 팔과 온몸의 근육을 이용해 붓질을 하는 게 진짜 어렵다”며 “농도에 따라 물감이 따귀를 때리듯 얼굴을 덮칠 때도 있고 입에 들어갈 때도 많다”고 했다. 그는 “관객이 이 힘든 장면을 꼭 알아주셨으면 한다”며 웃었다. 박정복 역시 “처음엔 팔 한쪽만 사용했는데, 붓질하는 에너지가 객석까지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안 뒤부터는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이 장면에서는 두 배우의 거친 숨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운다.

대사가 현학적이고 어렵다는 반응도 있다. 이들은 “니체, 쇼펜하우어 등 철학적 대사를 100%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박정복은 “김태훈 연출가로부터 켄이 철학적 내용을 다 이해하지 않은 채 연기하는 게 낫겠다는 조언을 들었다”고 귀띔했다. 김도빈은 “관객마다 각자 다르게 느끼고 이해하는 모든 게 정답”이라고 했다. 2월 1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4만∼6만 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레드#마크 로스코#박정복#김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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