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하나 큰사전에 관심 안 보여” 물불의 怒聲, 출판사 움직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31일 03시 00분


[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조선광문회와 ‘말모이’ 편찬

일제강점기 우리말 사전 편찬 노력을 소재로 한 영화 ‘말모이’. 조선말 큰사전 원고는 조선어학회가 1942년까지 작성했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제에 압수됐다가 1945년 9월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됐다. 동아일보DB
일제강점기 우리말 사전 편찬 노력을 소재로 한 영화 ‘말모이’. 조선말 큰사전 원고는 조선어학회가 1942년까지 작성했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제에 압수됐다가 1945년 9월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됐다. 동아일보DB
고정일 동서문화사 발행인
고정일 동서문화사 발행인
‘어디를 둘러봐도 진실인지 아니할사, 속이고 얼러맞춰 얼쯤얼렁 하는 일들, 어깨를 부비는 위에 나라가 떠 있도다/남산과 북악산을 물끄러미 쳐다볼사, 거짓과 겉발림이 하도 많은 세상이매, 저들의 우뚝한 것은 정말인가 하웨라/아무리 그렇게야 엉터리 세상이리, 아마도 지나치게 잘못 봄이 아닐까 해, 감았다 떴다 하면서 눈을 의심하여라.’

최남선의 절절한 애국혼이 넘치는 글이다. 국권피탈 뒤 일제는 조선인의 모든 정치·사회단체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한다. 신문화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1910년대는 민족운동사의 암흑기이며 진로 모색기였다. 일제가 문화말살정책을 펼치며 조선 고서들을 마구 앗아가자 박은식의 지도를 받은 최남선을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은 한민족의 슬기가 묻혀 후손들이 재능의 원천을 잃어버릴 것을 걱정했다.

1910년 10월. 최남선은 살림집을 서울 삼각동 굽은다리로 옮겨 그 앞채 2층에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발족시킨다. 조선광문회는 신문화운동의 요람이자 조선 최고 지식인들의 학문적 근거지, 민족문화운동가들의 ‘양산박’이었다. 주시경 김두봉 이광수 박종화 홍명희 안재홍 정인보 한용운 고희동 안창호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등 선각들이 속속 모여들어 조선팔도 애국운동과 세계정세를 탐구하며 계획했다. 조선광문회 애국지사들은 민족의 독립 의지를 일깨우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으며, 일본 유학생 이광수 김도연 백관수 등의 도쿄 2·8독립선언에 이어 최남선은 김성수 최린 등과 3·1독립운동을 추진해 나아갔다.

조선광문회는 조선의 사기(史記)·지지(地誌) 등 민족학술 가치가 막중한 부문 저술을 엄밀히 골라내 발간했다. 조선광문회의 최고 업적을 꼽자면, 우리나라 최초 한글큰사전 편찬이다. 최남선은 주시경과 한글운동을 일으켜 이광수 임규 김두봉 한정 권덕규 등과 함께 1911년부터 1916년에 걸쳐 한국 최초 국어사전인 ‘말모이’를 만들어 나아갔다. 이로써 일제가 어용학자들을 동원해 편찬하는 ‘조선어사전’에 맞서 우리말을 지켜냈으며, 그 뒤 여러 한글사전 편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50년대 이전 한자사전 가운데 가장 우수한 ‘신자전(新字典)’을 1915년에 출간했다.

‘말모이’는 주시경이 편찬 책임자가 되어 어휘 수집을 시작했고, 김두봉과 김여제가 조수로 도왔다. 이후 47년간의 역정을 거쳐 1957년 을유문화사에서 총 6권으로 완간된다. 1947년 10월 9일 을유문화사는 ‘조선말 큰 사전’ 첫 권을 펴냈다. 최근 영화 ‘말모이’로 상영되고 있는 이 사전의 편찬 과정은 우리 민족과 문화의 수난사나 다름없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도 이 과정에서 일어났고, 옥중고혼으로 사라진 편찬위원들은 ‘말모이’ 원고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조선어학회 사건 법정 증거물로 압수된 원고가 경찰서와 형무소로 옮겨지면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가 1945년 9월 뜻밖에 사전 원고 보따리가 서울역 운송창고에서 발견되었으니,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1947년 을유문화사가 펴낸 ‘조선말 큰사전’ 첫 권. 동아일보DB
1947년 을유문화사가 펴낸 ‘조선말 큰사전’ 첫 권. 동아일보DB
1947년 어느 봄날, 이극로와 김병제가 을유문화사 편집실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조선어학회 사건’과 ‘큰사전’ 원고에 얽힌 곡절을 들려주면서 출판을 제의했으나 물자난이 극심한 때여서 을유문화사 측은 두 번씩이나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이극로 김병제가 이희승과 함께 찾아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이극로는 가져온 원고 뭉치로 책상을 내리쳤다. “누구 하나 ‘큰사전’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니 우리나라가 해방된 의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 이 원고를 가지고 일본놈들한테 찾아가서 사정해야 옳단 말이오?” 아호가 ‘고루’ 또는 ‘물불’인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 간사장이었다.

물불의 노호일성은 곧 우리 문화계 전체의 노성(怒聲)이며 질타였다. 한글학자들의 뜨거운 열정에 감동한 을유문화사는 이때부터 모든 능력과 열의를 ‘큰사전’ 간행에 쏟아부었다. 그 뒤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큰사전’은 1957년 10월 9일에 이르러 전 6권이 모두 간행됐다. B5판 양장본 3804쪽, 올림말 16만4125개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이다. ‘말모이 큰사전’의 의의는 당시 동아일보 사설에 담겨 있다.

“이제 새로 출판된 우리말 ‘큰사전’을 보건대, 그 인쇄 제본 장정 등에서 진선지미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대 저작이요 인쇄문화의 최고봉일 줄로 안다. …우리의 학술문화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우리 손으로 창조된 것이 없는데 ‘큰사전’만은 본질적으로 우리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정일 동서문화사 발행인
#말모이#조선말큰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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