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은나라 때 간지는 날짜에만 적용됐다. 연도까지 간지로 세며 그 안에 운수론적 의미를 담기 시작한 건 후대 일이다. 대략 음양오행사상이 완성된 한나라 무렵으로 추측된다. 예컨대 후한의 문자학자 허신은 저서 ‘설문해자’에서 간지자에 담긴 천지운행의 율려(律呂·동양적 음률)를 그만의 독특한 유기적 우주론에 결합해 설명했다. 물론 갑골문 연구가 보편화된 뒤로 이런 해석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례로 허신이 음의 기운이 다하고 양의 기운이 상승하는 도상적 상징성을 갖는다고 해석한 ‘인(寅)’자는 실제론 화살 모양을 본뜬 상형자로 가차를 통해 간지자가 된 경우다.
기해년을 황금돼지해로 규정하는 생각 속에는 우주의 우발적 흐름에 규칙을 부여해 삶에 안정적 리듬을 확보하려던 오행론적 개념이 담겨 있다. 과학적 견지에서는 미신에 가깝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운명의 주기를 믿고 싶어 하며, 설령 내심 믿지는 않더라도 즐거운 상상의 유희로 긍정하기도 한다. 그런 유희를 통해 자신의 삶에 성숙한 비전을 가져올 수 있다면 역사 속 기해년을 반추하려는 우리 시도도 그저 헛되지만은 않으리라.
백제 무왕의 왕비
639년 기해년, 백제 무왕의 왕비는 막 완공된 전북 익산의 미륵사 서탑에 사리를 봉안했다. 그런데 2009년 복원을 위한 서탑 해체 작업 도중 발견된 사리봉안기에 따르면 그녀는 무왕의 아내로 익히 알려진 신라 선화공주가 아니라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로 밝혀졌다. 그녀의 역사적 실체나 선화공주와 관계 같은 전문적 사안은 논외로 하자. 중요한 건 무왕 시대에 선화공주로 상징되는 친신라 세력보다 익산과 부여를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이 강화됐다는 사실이다. 서동이 돼 진평왕의 딸과 사랑을 속삭일 만큼 신라에 포용력 넘치는 존재로 보이던 무왕은 실제 왕이 돼서는 철저히 신라를 배척하고 고구려, 왜와 동맹을 강화하는 전략을 폈다.
고구려-백제-왜로 이어지는 동맹 라인을 공고히 한 무왕의 본뜻은 중원에서 일어난 강력한 정복 왕조인 당을 견제하면서 인접국 신라를 쪼그라뜨려 침체돼 있던 자국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을 터. 하지만 이런 실리 위주의 전략은 백제 귀족을 왕 주위에 결속시키는 효과를 낳은 반면, 신라와 전략적 공생관계의 균형이 깨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로 인해 절박한 생존 위기에 처한 신라가 당과 연합해 마침내 백제를 무너뜨리게 된다.
무왕이 한 선택은 오로지 그 혼자만의 결단은 아니었으리라. 가장 약해 보이는 이웃을 적으로 돌리고 강성한 제삼자를 우군으로 삼는 방책은 당장 약효를 발하는 대증용 약재와도 같아 누구나 선뜻 구미가 당긴다. 그렇다 보니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물리적, 심리적 전리품들을 나눠 가진 왕과 친위 귀족은 안으로 더욱 똘똘 뭉쳤을 것이다. 하지만 한 세력이 나머지를 모조리 흡수하지 못하는 한 힘의 균형추는 늘 가운데 눈금으로 향하게 돼 있다. 고구려나 왜에 반대하는 내부 세력, 신라와 동맹을 유지하려는 내부 세력, 그리고 무엇보다 신라 전체가 필사적으로 무왕 세력에 대항하고자 단결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신라에 적대 정책을 편 무왕과 익산을 중심으로 한 토호귀족 사택 씨의 견고한 제휴를 상징하는 미륵사 서탑 사리봉안기는 역사 흐름의 조짐에 눈감은 불행한 선택의 흔적일 수 있다. 아니, 백제 멸망의 조짐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이처럼 훗날 심대한 변화를 몰고 올 조짐들은 지나고 나서야 눈에 띄거나 당시에는 사소하게 취급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폭정의 잉태, 예송논쟁의 점화, 태풍 사라
1179년 기해년에는 고려 무신정권을 창출했던 정중부가 경대승에 의해 살해됐다. 왕조 질서를 뿌리째 뒤흔든 정변의 주역이던 정중부는 인종이 각별히 총애한 무신이었다. 그런 그가 역모의 중심에 뛰어든 건 사소한 한 사건이 빌미가 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신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연회 도중 그의 수염을 불태웠다는 유명한 일화가 그것이다.
조선과 달리 고려는 유교 의례가 엄격히 정착된 사회가 아니었다. 상하가 격식 없이 음주가무를 즐겼다. 임금과 신하가 어울려 시를 짓고 폭음하던 당시 분위기에서 김돈중의 실수는 슬쩍 넘겨도 좋을 일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자존심 강하고 하필 술기운마저 없던 정중부는 이를 용서치 않았고, 이는 평소 문무 차별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신들의 화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고려 멸망을 몰고 온 도화선이 된 홍건적의 침입이 1359년 기해년에 벌어졌으며, 왕가의 사사로운 폭력 사태처럼 보였지만 훗날 연산군 폭정의 빌미가 된 왕비 윤씨의 성종 용안 훼손과 이로 인한 폐비 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1479년 기해년이었다.
1659년 기해년에는 조선의 왕 가운데 마지막 북벌을 기획했던 효종이 숙원을 이루지 못한 채 승하했다. 효종의 꿈이 무산되면서 외부의 적을 겨냥해 국세를 확장하려던 기세는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또한 이 사건 직후 자의대비(효종의 아버지 인조의 두 번째 왕비)가 상복을 몇 년 입느냐를 두고 예송논쟁이 점화함으로써 조선은 공리공론의 나라로 기울어가게 된다.
1839년에는 3명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비롯해 천주교인 119명이 처형되거나 투옥된 기해박해가 발생한다. 표면적으론 2차 천주교 박해였지만 이면적으론 헌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 득세한 풍양조씨 문중과 정조 사후 세도정치의 핵이던 안동김씨 문중 간 권력 투쟁의 부산물이었다.
이 밖에 1899년 기해년에는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이 정부에 비판적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창간 4년 만에 폐간된다. 공교롭게도 60년 뒤 기해년인 1959년 4월에는 이승만 정부를 향해 맹렬하게 필봉을 휘두르던 ‘경향신문’이 폐간의 아픔을 겪다 1년이 지나 4·19혁명 직후 복간된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사망·실종 849명, 부상 2533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인명피해를 안긴 태풍 ‘사라’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이처럼 지난날의 수많은 조짐을 돌이켜보면 볼수록 우리는 문득 숙연해지고, 환히 웃는 기해년 첫 태양을 바라보면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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