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김재형 “공연하며 반성”…소프라노 폭행 후 첫 심경고백

  • 뉴시스
  • 입력 2019년 2월 7일 06시 06분


예술가가 일궈낸 결실과 도덕적 평판은 별개로 봐야 하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견해는 대개 통했다. 하지만 예술가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 즉 술의 신 가면을 쓰고 밀어 붙이는 방탕에 엄격한 잣대가 드리워지는 시대가 왔다.

도덕·윤리에 어긋나는 예술가의 일탈이 ‘예술적 승화’라는 미명으로 더 이상 감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음주에 관대한 편인 한국의 문화도 변화될 전망이다.

프랑스에서 술에 취한 채 여성 동료를 폭행한 테너 김재형(46)이 20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여는 독창회 ‘모멘트: 새로움의 시작’을 앞두고 온라인과 클래식음악계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인 이유다.

프랑스 툴루즈 형사재판소는 2017년 3월22일(현지시간) 김재형에게 폭행 등의 혐의로 벌금 8000유로(약 966만원)와 집행유예 8개월을 선고했다. 같은 달 20일 밤 여성 동료를 폭행한 혐의다.

당시 김재형 측은 “약간의 술을 마시고 여성 동료와 언쟁을 벌이다가 그녀를 폭행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계획된 것이 아닌 우발적인 일이다. 동료에게 사과를 했고, 그녀가 이를 받아들였다.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하지만 폭행, 특히 여성을 폭행한 건 무조건 잘못”이라고 밝혔다.

폭행 자체도 용인할 수 없는데, 페미니즘이 부각되는 이 시대에 여성 폭행이라니. 어떤 변명도 쉽게 용납이 안 될 법하다. 그가 공공예술기관인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당연하다.

게다가 김재형은 국공립 예술단체인 국립오페라단이 프랑스 작곡가 오펜바흐(1819~1880) 탄생 200주년을 기념, 10월 24~2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호프만의 이야기’에도 캐스팅됐다.

이미 김재형은 지난해 10월 ‘세일 한국가곡의 밤’, 대전예술의전당 오페라 ‘라보엠’ 등에 출연하는 등 국내 무대에 서왔다. 하지만 이처럼 클래식음악 중심 기관이 마련하는 무대에 잇따라 오르는 것을 놓고는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공연 자체를 용납 못한다’, ‘자숙 기간이 짧다’, ‘예술가도 실수할 수 있는데 생업의 기회까지 박탈하는 것은 너무 엄격하다’ 등의 의견이 맞서는 형국이다.

김재형은 세계무대에서 ‘앨프리드 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정상급 테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 빈 슈타츠오퍼, 바르셀로나의 리세우 극장 등 세계 주요 극장에서 주역으로 활약해왔다.

폭행 논란 이후인 2017~2018 시즌 함부르크 국립오페라 ‘팔리아치’,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등에서 주역으로 활약했다. 특히 폭행이 벌어진 나라인 프랑스의 다른 극장인 파리바스티유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에도 주역으로 나왔다. 2018~2019 시즌에도 오페라 홍콩, 마드리드 왕립극장, 빈 국립오페라, 오퍼 프랑크푸르트, 칠레 산티아고 극장 등 세계 주요 공연장 무대에 올랐거나 오를 예정이다.

해외에서 공연을 끝내고 설 연휴 직전인 지난 1일 입국한 김재형을 만났다. 김재형이 폭행 사건과 관련, 직접 입장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한 것이 없으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해명할) 기회도 없었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과 함께 말해봤자 궁색한 변명이 될 거라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면서 김재형은 스페인에서 함께 공연한 다른 소프라노 이야기를 꺼냈다. 여성 단체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소프라노였는데, 처음에는 그를 경계했다고 한다. 폭행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단체에서 일하는 소프라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스페인에서 소프라노와 대화를 하는 동안 수차례 말했다. 반성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자괴감, 죄의식을 계속 가지고 있고, 내 인생에 영영 오점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나로서는 (반성하고 있다는) ‘내 진심’을 자꾸 보여주고 싶었다. ‘이러 일을 다시 할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사람들을 상대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불편하게 여기고 업신여기는 것은 사람들 몫이다. 대화를 한 뒤 소프라노가 다가오더라. 그 다음부터는 작품에 편하게 임했다.”

-만취한 상태에서 여성 동료를 폭행했다. 그런데 술에 취한 것은 정당화나 변명이 될 수 없다. 집행유예 8개월과 함께 벌금 8000유로를 선고 받았는데 한 편에서는 사건을 축소, 은폐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반성도 하지 않은 채 또는 너무 짧은 자숙 기간 뒤 유럽에서 활동한다는 비판도 있다.

“술 취한 것이 변명이 안 된다는 것은 나 역시 잘 안다. 기억을 못하는 것이 큰 죄다. 그런데 유럽에서 반성도 안 하고 오페라를 하고 있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내가 직접 나서서 작품 8개를 취소하려고 했다. 취소가 된 것은 두 작품이다. 나를 무대에 올린 극장 중 한 곳의 극장장은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고, 충분히 반성할 것이라는 걸 안다. 평소에 너를 알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씀해줬다. 사건을 축소, 은폐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사건이 벌어진 당일 경찰에서 진술을 할 때 나는 시간에 쫓겼다. 그날 공연을 했어야 했는데, 경찰이 잘 협조하면 오후에 공연을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여성 동료로 알려졌는데 항간에서는 여자친구라는 설도 있다. 싸운 이유가 무엇인가.

“여자친구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개인적인 부분인데, 내가 듣기 싫은 이야기가 있다. 남들하고 비교당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그 부분 때문에 말다툼이 있었다. 자리 자체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태어나서 손찌검을 해본 적이 없는데 너무 화가 나서 동료의 뺨을 쳤다. 이후 실랑이를 벌였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르는 것에 대해 찬반이 극렬하게 갈리고 있다.

“내 실수가 털어지지는 않겠지만 내가 ‘반성하고 있다’는 진심을 자꾸 보여주고 싶다.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다는 것을 거듭 말씀드리지만,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조차 못하게 한다면, 나는 그분들(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나. 앞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을 다시는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그런(폭행을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영원히 가슴 속에 짊어지고 살 거다. 다만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것이 직업이니까, 그걸 통해서 진심을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박수를 보내주시는 분에게는 감사하고 질타를 주는 분의 질타도 고스란히 받겠다.”

-정말 반성을 한다면 ‘노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부 의견도 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자숙의 시간이 너무 짧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신의 경력과 명예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인가.

“너무 냉혹한 질문이다. 내가 남들보다 능력이 좀 더 있어서 운 좋게 여기까지 왔다. 잘못을 했으니 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 부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의견을 주는 분들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요구는 폭력적일 수 있다. 질타는 개인적으로 질타를 하면 된다. 나는 그것을 감당해야 하고.”

-폭행을 당한 소프라노와 이후 관계는 어떤가.

“솔직히 좋은 관계는 아니다. 다만 내 사과를 받아줬다. 그래도 당한 입장이니 상처가 큰 것은 알고 있다.”

-재직 중이던 경희대 음대 교수 직에서 이번 폭행 건으로 퇴직처리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학교에서 관련 일로 징계를 받았다. 징계가 풀리고 나서, 해외 활동 등의 건이 겹쳐 스스로 사표를 낸 것이다.”

-이번 독창회가 ‘순수의 시절, 혼돈의 서막, 역동적 인내, 새로움의 시작’ 등 4개의 주제 위에서 흘러갈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런데 폭행으로 인한 괴로움을 너무 자기애적,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그런 의도가 없었다. 이번에 크로스 오버도 선보이는데 그 자체가 새롭다(김재형은 지난해 5월 발매한 음반 ‘모멘트’에서 광고음악가 DJ 샤이와 작업한 곡들도 이번 독창회에서 선보인다) 크로스 오버를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번에 새롭게 도전한다는 뜻에서 주제를 붙였다. 다른 주제들도 노래에 맞춰서 정한 것이다. 슈만 ‘당신은 한송이 꽃이요’는 순수의 시절, 말러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는 방황과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오묘한 조화’는 역동적인 인내를 다룬 것일 뿐이다. 그런 오해를 산다는 것은 내 잘못이자 불찰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무서워한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며 다가서서 말을 걸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불미스런 일까지 겹치면서 더 그렇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도 많고, 사람들을 일일이 다 챙겨주는 편이다. 나에 대한 비판은 다 안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폐쇄적인 클래식음악계에서는 이런 논쟁조차 공론화되기 힘들었다. 유리천장이 공고해 여성 예술가가 관련된 이슈에서는 더 그랬다. 인권과 여권이 강화되는 사회적 흐름과 맞물려 이런 이슈에 대한 갑론을박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만 해도 변화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엄연하다. 클래식음악 관계자는 “김재형으로 인해 점화된 ‘예술과 도덕은 별개인가’ 화두는 계속될 것”이라고 봤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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