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노지공원에 집결하라”… 염상섭, 노동자중심 항일투쟁 불지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9일 03시 00분


[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34화>일본 오사카

염상섭의 거사 장소인 오사카 덴노지공원은 100년 전과 크게 달라졌다. 오사카 시립미술관 오른쪽과 공원 밖 고층 건물 사이의 녹지 공간(점선)이 3·19독립선언을 위해 한인 노동자들이 모였던 공회당 자리로 추정된다. 동아일보DB
염상섭의 거사 장소인 오사카 덴노지공원은 100년 전과 크게 달라졌다. 오사카 시립미술관 오른쪽과 공원 밖 고층 건물 사이의 녹지 공간(점선)이 3·19독립선언을 위해 한인 노동자들이 모였던 공회당 자리로 추정된다. 동아일보DB
1919년 도쿄(東京)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이후 국내에서 3·1운동의 불길이 타올랐지만 일본에선 한동안 항일 활동이 중단됐다. 2·8선언 때 많은 학생이 구속된 데다 이후 도쿄 유학생들이 본격적인 귀국길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 경찰에 따르면 도쿄 유학생 지도부가 ‘재동경조선청년독립단 동맹휴학촉진부’ 명의로 본국 운동에 합류하라고 독려하면서 359명이나 귀국했다. 2·8선언 당시 도쿄 지역 유학생이 642명이었으니 절반 이상이 떠난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몰려 있던 오사카(大阪)에서 항일 투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소식이 들려왔다. 염상섭(1897∼1963)이 주도한 ‘3·19 오사카 독립선언’이었다. 훗날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만세전’ ‘삼대’ 등을 발표하며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염상섭은 오사카 독립선언서에서 독립의 근거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는 한편 일제가 조선을 동화시키기 위해 만든 ‘동조동근’(同祖同根·일본과 한국의 조상이 같고 뿌리가 같다는 의미)론을 강력 비판했다. 당시 오사카아사히신문은 ‘시내 조선인 검거, 불온한 비밀 출판을 배포하고 시위운동용 깃발 은닉’이라는 제목의 3월 21일자 기사에서 “19일 오사카 시내 덴노지(天王寺) 공원 음악당(공회당)에 집결한 조선인 24명이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오사카마이니치신문도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 유학생 대신 노동자 중심의 항일 투쟁


게이오대 유학생이었던 염상섭(사진)은 고종 인산일(장례식 날)인 3월 3일 유학생 중심의 요배식(왕을 향해 절하는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사카에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사실을 접한 염상섭은 “피의 혈관이 터질 듯이 끓어올라서 복받쳐 울었다”.(강영심·김도훈·정혜경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요배식은 오사카의과대학생 정구충의 하숙집에서 열렸다. 염상섭은 이 자리에서 이경근 백봉제 고영순 권태형 김시창 김형식 호정호 등 유학생들과 시위 계획을 논의했다. 하지만 이들이 동참을 거부하자 단독으로 하겠다며 도쿄로 돌아갔다.

도쿄에서 만난 게이오대 동창생 변희용은 학생층 대신 오사카 거주 노동자를 기반으로 시위운동을 진행할 것을 권유했다. 당시 오사카에 거주하던 한국인 대부분은 노동자(3000여 명으로 추산)였고, 지식인과 학생층은 적었다. 변희용은 또 35원의 자금 지원과 함께 시위 관련 문건 작성 시 등사 대신 골필(먹지를 대고 복사할 때 쓰는 필기도구) 사용을 조언했다. 이 조언은 나중에 재판을 받을 때 유용하게 작용했다.

염상섭은 오사카로 복귀하던 중 기후(岐阜)역에 내려 인근 여관에서 자신이 쓴 독립선언서를 수십 장 만든 뒤 16일 오사카에 도착했다. 이후 이경근 백봉제 등을 만나 시위 계획을 설명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지만 이들은 학생 신분으로 나서기 어렵다며 서명을 거부하는 대신 물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에 염상섭은 두 사람과 함께 골필과 탄산지를 이용해 격문과 독립선언서 수십∼수백 통을 준비했다. 격문에는 19일 오후 7시 덴노지 공원에 모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18일 밤에는 오사카 공장지대를 돌면서 한인 노동자들에게 격문과 붉은색 완장을 나눠 줬다.

○ 잠복한 일경에 거사 직후 체포

일본 부두에 도착한 한인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독립기념관 제공
일본 부두에 도착한 한인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독립기념관 제공
마침내 거사일이 밝았다. 염상섭은 덴노지 공원 주변을 여러 번 정찰하면서 오후 7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감옥에 갇히면 읽을 생각으로 헌책방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를 구입하기도 했다.(‘염상섭 문장 전집’)

약속된 시각 염상섭은 독립선언서 230장, 격문 1장, ‘대한독립’ 깃발 1개, 일본어로 된 독립선언서 13장을 몸에 지니고 공원에 들어섰다. 당초 계획은 선언서 낭독과 만세 삼창을 한 뒤 시가행진까지 하는 것이었다. 공원에 모인 한인 노동자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고 일본 내각총리대신, 중앙위원장, 신문사, 대학교수 등에게 보내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마자 현장에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염상섭은 독립선언서 끝부분에 ‘재대판(在大阪) 한국노동자 일동대표 염상섭’이라고 적어 자신을 노동자 대표로 스스로 규정했다. 체포된 이는 염상섭을 포함해 모두 24명이었다.

조사 결과 현장에서 체포된 노동자 23명 중 11명은 오사카 시내 김상원의 집에 머무르던 무직 노동자들이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 종전(1918년 11월) 이후 글로벌 불황으로 일본에서도 실업자가 증가했다. 오사카아사히신문은 체포 소식을 알린 첫 기사에서 “약 3000명의 오사카 조선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속출하고 유민이 증가하면서 사상적으로 험악한 경향을 띠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체포된 노동자 중 이름이 확인된 좌공림은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2년 뒤 경기도책에 선출된 인물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전파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돼 1929년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2·8독립선언 100주년을 하루 앞둔 7일 오전 찾아간 덴노지 공원에서 오사카 독립선언의 흔적은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공원 앞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염상섭의 거사 장소였던 공회당 건물부터 찾았다. 공원 입구에서 200∼250m 걸어 들어가 공회당 터로 추정되는 곳을 살펴봤지만 잔디밭과 아스팔트 포장도로만 보였다. 공회당이 있던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300m 높이의 초고층 건물 아베노하루카스가 마치 공원 안을 내려다보듯이 웅장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취재에 동행한 민단 오사카 지역본부의 정병채 부단장(69)은 “많은 교민이 일본에선 도쿄의 2·8선언만 3·1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오사카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니 놀랍기도 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 옥중에서 펼친 선전전

3·1운동 확산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일경은 오사카 한복판에서 독립운동을 시도한 염상섭을 엄벌에 처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하지만 시가행진이나 경찰과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내란죄를 적용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주동자인 염상섭과 시위 준비를 도운 이경근, 백봉제만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고 덴노지 공원에서 체포된 23명은 석방했다.

일본 법원은 1심에서 염상섭에게 금고 10개월, 이경근과 백봉제에게 금고 3개월 15일을 선고했으나 그해 6월 열린 2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염상섭 등 3명이 일본의 국헌을 문란케 한 것은 인정되지만 골필과 탄산지를 이용한 것은 출판법 위반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당시 변호사가 프랑스 판례를 들어 “필사한 것은 아무리 불온 문서라 하더라도 출판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였다. 세 사람은 무죄 판결 사흘 뒤 풀려났다.

염상섭은 감옥에 갇혀 있던 기간에도 일본 신문·잡지 지면을 활용한 선전전(宣傳戰)을 활발하게 펼쳤다. 우선 도쿄제국대 학생이 중심이 돼 결성한 ‘신인회’ 기관지 ‘데모크라시’ 2호(1919년 4월 발행)에 ‘조야의 제공에게 호소함’을 투고해 독립선언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 글에서 염상섭은 “일본의 쌀 폭동(1918년)과 유학생의 행동은 그 표면은 달라도 그 생존의 보장을 얻으려는 진지한 내면적 요구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없다”며 독립운동의 민중운동 성격을 강조했다.

신인회는 같은 호에 실린 ‘조선청년 제군에게 드린다’에서 “일국(一國)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의사에 반해 그것을 지배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하다. 우리는 충심으로 벗들의 동포가 자유로운 천지로 해방돼 서로 더불어 형제로서 생활하는 날이 조속히 도래하기를 열망한다”며 조선 청년들과의 연대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염상섭은 또 오사카아사히신문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서’를 일본어로 작성해 투고했는데 신문에 게재되지는 않았다. 오사카아사히신문과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은 염상섭이 거사하고 석방되기까지의 과정을 각각 6차례 보도했다. 염상섭이 생전에 회고했듯이 자신이 체포되더라도 (일본) 신문에 보도만 되면 그만큼 효과는 날 것이라는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석방된 뒤 염상섭은 그해 11월 노동운동을 지향하며 요코하마의 한 인쇄소에 노동자로 취업했다가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맞춰 정경부 기자로 발령받고 귀국했다. 이종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염상섭의 오사카 독립선언은 일본 신문들이 석방될 때까지 계속 보도하면서 잘 알려졌다”며 “동아일보에 들어가게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 한인 노동자 집결지 오사카… 1920년대 노동-항일운동 거점으로 ▼

일본 전체 한인 노동자 25% 차지… 염상섭 거사후 한인 노동쟁의 급증

일본 오사카성 인근에 세워진 ‘오사카 사회운동 현창탑’ 전경(왼쪽 사진)과 그 안에 있는 기념비. 오사카=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일본 오사카성 인근에 세워진 ‘오사카 사회운동 현창탑’ 전경(왼쪽 사진)과 그 안에 있는 기념비. 오사카=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사실상 염상섭 단독 거사로 추진된 1919년 오사카 3·19선언은 망국의 한을 품고 살아가던 오사카 한인 노동자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차별에 시달리며 생계를 위해 묵묵히 일만 하던 노동자들은 염상섭 체포를 계기로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연이은 본국의 3·1 만세운동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식도 점차 생겨났다. 이러한 각성은 1920년대 오사카에서 벌어진 노동운동과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도쿄가 한인 유학생들의 중심지였다면 오사카는 한인 노동자들의 집결지였다. 1925년 당시 오사카의 한인 노동자는 3만4311명으로 일본 전체 한인 노동자(13만6709명)의 25.1%를 차지했다.(‘조선인 현황’)

노동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한인 노동자는 식민지 민족에 대한 차별 등이 작용해 일본인보다 적게 받았다. 1930년대 한인 노동자의 임금은 하루 평균 1엔 22전으로 일본인 노동자(2엔 5전)의 절반 수준이었다. 1915년 조선소 견습공으로 일하며 일급 85전을 받았던 김태엽은 당시 처우를 이렇게 기록했다.

“합숙소 생활은 비참했다. 먹기 고약한 안남미 밥에다가 썩은 단무지 몇 쪽, 그리고 소금국이 변함없는 우리의 식사였다. 그러고도 하루 식대는 50전이었다. 알선업자에게 진 빚을 매달 공제해야 하고 의복비 이발료 목욕비 약값 등을 계산하다 보면 빚이 줄기는커녕 점점 늘어나기 마련이다.”(김태엽 ‘항일조선인 증언’)

1919년 들어 일본 내 한인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도 급격히 증가했다. 염상섭 거사 석 달 뒤 후쿠시마 탄광들에서 일어난 한인 광부들의 쟁의는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염상섭의 거사지인 덴노지 공원은 이후 4대 기념일 투쟁(3·1운동 기념일, 국치일, 관동지진조선인학살일, 노동절)은 물론이고 조선총독 폭압정치 반대 투쟁 등이 주로 열리면서 오사카 지역 한인들의 항일집회 거점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1927년 6월 1일 덴노지 공원에서 열린 총독 폭압정치 규탄대회(4000여 명 참가)는 도쿄 등 다른 지역으로 항일투쟁이 확산되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오사카=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3·1운동#일본#오사카#한인 노동자#염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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