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바위에 놓인 조그마한 쪽지, 벽에 비스듬히 기대 경치를 바라보는 듯한 우산, 고요한 실내에 문을 열자 펼쳐지는 호수.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지만 미묘한 구도가 자아내는 낯선 느낌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고 궁금증을 자극한다. 4년 만에 개인전을 여는 화가 황규백(87)은 “재미있게 즐기며 행복하게 그렸다”면서 그림들을 소개했다.
서정적인 판화로 잘 알려진 황 작가가 이번에는 캔버스에 그린 유화, 아크릴화 20점을 내놨다. 그는 “판화는 체력 소모가 심해 회화로 옮겼다”며 “붓으로 작업해 사물들을 내 뜻대로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고 했다.
모두 최근 1∼2년간 작업한 그림들로, 남북 정상회담을 본 느낌을 담은 ‘SOUTH AND NORTH SUMMIT’도 있다. 그는 “남북 정상이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웃으며 회담하는 모습을 본 게 유별나 작품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창문 너머 아무도 없는 도보다리가 보이고, 창틀에는 비스듬히 기댄 우산과 시계가 있다. 황 작가는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낼 수 있고 모양도 예뻐서 그렸고, 우산은 남북 정상이 무슨 얘기를 하나 엿듣는 나의 모습을 의미한다”며 웃었다.
황 작가의 대표작은 1970년대 잔디밭 위에 펄럭이는 손수건을 표현한 연작이다.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와 섬세한 메조틴트 기법으로 주목받았다. 1968년 프랑스로 건너가 판화가의 길을 걸으며 ‘판화의 재창조’라는 평가를 받고 파리와 미국 뉴욕에서 활동했다.
그는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진취적인 세계를 보고 새로운 걸 해야겠다는 고민을 하다 잔디밭에 누워 손수건을 펴보고 소름이 돋아 만들게 된 작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를 주목받게 해준 은인과 같은 작품이다. ‘손수건’이 없었으면 배추장사를 했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그림을 상상으로 시작했다는 작가는 “그림 속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관객들이 즐기길 바란다”고 했다. 다음 달 10일까지.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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