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을 두드리는 듯한 경고음. 멀리서 디젤기관차 앞머리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철도 관리원 5명과 의경 2명의 손길이 분주해진다. 손에 든 빨간 수기를 흔들더니 호루라기를 불어댄다.
‘삑∼!’ ‘빽, 빽∼!’
8일 오후 인천 중구 항동1가. 월미로와 인중로가 만나는 우회고가사거리 건널목에 소리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무연탄을 실은 20량짜리 화물열차가 내는 엔진 굉음이 건널목 쪽으로 다가왔다.
‘비이이이잉….’
소리는 점점 커져오고 이어서 육중한 음향.
‘덜컹, 덜컹….’
꽤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열차가 건널목을 통과한다. 아무런 약속도, 악보도 없는 1분 30초 동안의 합주. 끝나자 차량과 행인의 통행이 재개됐다.
“오케이!”
헤드폰을 쓰고 있던 안병진 경인방송 PD의 엄지가 올라갔다. 복슬복슬한 털 뭉치 같은 윈드실드(야외에서 바람 소리를 차단하는 녹음 장비)가 달린 마이크를 내려놓는 김용석 음향감독의 귀가 새빨개져 있다.
“잘 녹음됐습니다. 아주 좋아요.”
○ 무소음의 시대… 사라져가는 소리를 찾아서
2016년이었다. 머릿속으로만 소리 프로젝트를 구상하던 안 PD는 영화 음향작업을 하던 김 감독을 알게 됐다. 이성애자인 안 PD가 동성인 김 감독에게 던진 말은 꽤 로맨틱했다.
“나의 유지태가 돼 주세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연기한 음향기사 역할이 떠오른 것. 몸에 지방이 많다는 이유로 김 감독의 별명은 ‘유지방’으로 변질(?)됐다. 그해 말부터 이진희 작가까지 한 팀이 돼 인천, 경기 일대를 누비기 시작했다. 기술의 발달과 산업화 때문에 사라져가는 소리를 찾아서.
2년여 동안 발로 뛰어 채록한 소리를 경인방송 FM 라디오로 내보냈다. 백령도, 굴업도, 덕적도, 교동도, 팔미도, 무의도…. 음향 다큐멘터리 ‘소리로 떠나는 인천 섬 여행’의 시작이었다. 시리즈는 ‘인천의 소리’ ‘경기도의 소리’ ‘강화의 소리’ ‘인천 중구의 소리’로 이어지고 있다.
라디오 PD가 노래를 고르는 대신 소리 채집에 뛰어든 이유는 뭘까.
“세상은 점점 완벽한 ‘무소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생활용품도, 산업 기계도요. 층간소음은 살인의 동기까지 되잖아요?”
물건은 남겨두면 되지만 소리는 사라지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안 PD 팀은 인천 자유공원을 울리던 통행금지 사이렌을 박물관에서 꺼내 소리를 채록하기도 했다.
“음향 파일을 함께 기증했습니다. 이렇게 아카이브화한 소리를 박물관에 넣는 게 목표입니다.”
작업을 할수록 소리에는 체온이 있다는 것도 믿게 됐다. 방송이 나간 뒤 통금 시대의 추억을 털어놓는 청취자 사연이 쏟아졌다.
안 PD 팀은 요즘 인천 중구 원도심의 소리를 파고든다. 하루는 현장 녹음을 나갔다가 재개발 폐허 속에 둥지를 튼 제비의 날카로운 경고음을 듣고 무서워졌다.
“무소음의 미명 아래 사라지는 것, 우리 안에서 박살나는 것들이 있어요.”
○ 인간의 개입이 변화시키는 사운드스케이프
영화 ‘블라인드’에도 참여한 김창훈 음악감독은 지난달 자신의 세 번째 ‘사운드스케이프’ 앨범인 ‘제주 사운드스케이프 II―나 물동이 이상숙 이우다’를 발표했다. 말 그대로 제주의 소리 풍경을 채록한 음반이다.
2014년 ‘제주 사운드스케이프―지구의 리듬’ 음반이 첫 단추였다. 2015년 ‘DMZ 사운드스케이프-카르마’ 제작 때는 비무장지대로 들어갔다. 폭우로 굴절돼 울려오는 도피안사의 범종 소리, 날이 풀려 철골구조가 녹으며 내는 안동철교의 쇳소리를 담는 순간은 짜릿했다.
2016년 다시 찾은 제주에서 김 감독은 인천의 안 PD와 비슷한 두려움과 조급함을 느꼈다. 비자림로 확장을 위해 삼나무 수천 그루가 잘려 나간다는 뉴스를 듣고 숲 소리를 담기로 했다. 시선은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아갔다.
“그곳에 사는 1924년생 이상숙 할머니를 만났어요. 가파도의 개구리 소리, 용머리해변의 아침 바닷소리 사이사이에 할머니의 이야기를 넣었어요. 사운드스케이프란 자연뿐 아니라 그 지역의 건물이나 인간까지 포괄하는 거니까요.”
김 감독은 요즘 생태 음향에 관심이 많다. 그는 캐나다의 한 국립공원에 근무하는 소리 전담 직원 이야기를 들려줬다.
“매년 같은 시기 자연의 소리를 기록해 새의 종(種) 등 생태의 변화를 연구한다고 합니다.”
레이철 카슨의 명저 ‘침묵의 봄’이 떠올랐다.
○ ASMR 열풍… 다시 주목받는 소리 콘텐츠
요즘 환경 음향은 대중적 열풍도 높다. ASMR(자율 감각 쾌락 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콘텐츠가 대표적이다. 차 따르는 소리나 채소 씹는 소리만 몇 시간씩 들려주는 영상. 멍하니 틀어두면 집중력 제고나 불면증 해소에 도움을 준다고들 한다. 평일 오후 서울 카페 소음, 시험 보는 소리까지 조회 수 수만 회를 기록한다.
낭독도 사각거릴 정도로 속삭여야 더 인기다. 제약 광고에서 가수 아이유는 ‘아프지 마세요’라며 부러 속삭인다. 인공지능 스피커에 배우 유인나의 목소리 콘텐츠가 들어가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음악 콘텐츠 스타트업 ‘스페이스오디티’의 김홍기 대표는 “혼자 잠드는 게 힘든 1인 가족 시대, 소음이 사라지는 시대에 적당한 소음이 주는 편안함을 찾는 경향”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두부 장수의 짤랑대는 소리, 아이들이 노는 소리를 들으며 꾸벅꾸벅 졸던 옛 동네의 기억을 떠올렸다.
안 PD와 김 감독이 애타게 찾아 헤매는 소리도 실은 필부필부 모두가 목말라하는 바로 그 소리들이 아닐까. 동요 속의 아기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 어떻게 그렇게 꿀잠에 떨어진 걸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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