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관청-山위 1717건 시위… 전체 郡의 96%서 3·1운동 활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9일 03시 00분


[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백년 만의 귀환: 3·1운동의 기록
국사편찬위-본보 27일 3·1운동 100주년 학술회의
<2> 당시 한국인 3분의1 이상이 경험

1919년 3월 20일 경남 합천군 대병면 창리 장날. 4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이자 일본 헌병이 선두에 선 이병추를 총으로 쐈다. 분노한 군중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서류를 불태웠다. 같은 날 합천읍 장터에서도 일제의 무차별 사격으로 4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음 날인 21일 초계면 초계리 장날에는 40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 의해 2명이 순국했다. 23일 오후 3시경 삼가읍 광장에서는 시위대 1만3000여 명이 일제를 규탄했다. 마지막 연사 임종봉의 강연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일경이 발포를 시작했고, 총에 맞은 임종봉이 강단에서 굴러떨어졌다. 분노한 군중은 경찰주재소와 우편소로 몰려갔고, 군경의 발포에 13명이 다시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경남 합천군에서 며칠 새 벌어진 이 사건들은 3·1운동 ‘장터 시위’의 전형을 보여준다. 장터 시위는 수천 명 단위의 대규모로 전개됐다는 특징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새로 구축한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통해 당시 3·1운동 확산과 특성을 분석한 결과 지역별로 차이가 드러났다. 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의 농촌지역 3·1운동 양상 분석에 따르면 △경남지역에서는 장터 시위 △황해도에서는 관청 앞 시위 △경기 충청도 지역에서는 산상(山上)-횃불시위 등 3가지 형태가 많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러한 농촌지역의 다양한 독립만세 시위로 당시 한국인의 3분의 1 이상이 3·1운동을 경험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국편과 동아일보가 27일 서울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공동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장터 시위가 활발했던 대표적인 지역은 경남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경남지역 86개 면 가운데 장터 시위가 일어난 곳이 43곳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장이 서는 닷새마다 같은 장터에서 시위가 되풀이되기도 했다.

관청 시위는 마을 단위로 모인 만세시위대가 군청이나 면사무소, 경찰주재소, 헌병분견소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경우다. 시위대가 식민행정과 무단통치 기관을 직접 타깃으로 삼은 시위였다. 무장한 진압병력 앞에서 시위하는 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일제는 관청 시위에 ‘내란죄’를 적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위가 가장 많았던 지역은 황해도였다. 황해도 시위 발생 면(109개 면)의 84.4%가 경찰·헌병 기관이 소재한 곳이었다.

1919년 3월 3일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에서는 천도교도들이 헌병 분대로 몰려가 헌병 경찰의 철수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헌병의 발포로 9명이 순국했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교수는 “황해도는 천도교, 기독교계의 조직적 시위가 많았고, 서울과 평안도의 3·1운동 소식을 접하며 고양된 시위대가 위험을 무릅썼던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밤에 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산상 시위는 경기도가 가장 많았고, 충청남북도가 뒤를 이었다. 산상 시위는 시위대가 대중과 접촉하기 어려운 고산준령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다.

경기 강화군은 횃불 시위가 9곳에서 일어났다. 3월 18일 강화군청에서 1만∼2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뒤, 4월 1∼11일 곳곳에서 잇달아 횃불이 올랐다. 산 위에서 횃불을 올려 섬과 해안으로 떨어진 시위대 사이의 연대의식을 높인 것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국편DB에서 3·1운동은 시위만 1717건이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역시 DB를 분석한 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1919년 3∼4월 기준으로는 1689건”이라며 “이는 기존 연구의 집계(1180건)보다 509건 늘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편DB는 시위 외에도 시위 등의 계획(335건), 동맹휴학·휴교(60건), 철시(25건), 파업(3건), 기타 활동(327건)을 포함해 모두 2467건의 1919년 3·1운동 사건을 담았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시위 횟수를 1542건으로 전하고 있다.

3·1운동이 당시 행정구역인 12개 부(오늘날의 시) 전체, 220개 군 가운데 95.9%에 이르는 211개 군에서 벌어졌다는 것도 밝혀졌다. 당시 한국인들의 지역 인식 토대인 조선의 ‘옛 군’ 단위로 봐도 317개 군 가운데 288곳(90.9%)에서 운동이 일어났고, 군청 소재 면(220곳)의 86.8%(191곳), 전체 면(2509곳)의 40.4%(1013곳)에서 운동이 전개됐다.

대체로 평안, 황해, 함경도는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계의 조직적 운동으로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진 경우가 많았고, 한반도 중남부 지역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마을 단위의 시위가 많았다고 분석됐다.

▼ 日帝, 영덕 시위엔 경찰-헌병-군대 모두 투입해 탄압

경찰서가 시위 군중 감당 못하자 軍-헌병 동원해 발포… 8명 순국
시위 번지자 4월엔 군대 한국 증파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통한 일제 탄압 분석에서는 헌병과 경찰이 각각 군대와 공조해 탄압한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됐다. 경찰, 헌병, 군대가 모두 함께 만세시위를 탄압하기도 했다.

김명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27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논문에서 경북 영덕군 영해면의 사례를 소개했다.

영해면에서는 1919년 3월 18일부터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장터에 모인 군중 약 3000명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한 뒤 경찰주재소로 몰려가 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인 순사부장이 태극기를 빼앗으려 들자 분노한 군중은 주재소를 파괴했다.

그러자 영덕경찰서가 나섰다. 서장이 순사 4명과 함께 출동했으나 오히려 시위대에 포위돼 무장 해제됐다.

이번에는 군과 헌병이 무력 탄압에 나선다. 도장관(도지사)의 요청으로 18일 포항 헌병 분대 7명이 출동했다. 도장관은 대구에 주둔한 보병 80연대에도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80연대 장교 등 21명이 자동차편으로 포항에 왔고, 다시 배를 타고 영덕에 도착했다. 이 병력이 영해에 도착한 건 19일 오후 4시. 이들은 헌병과 함께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경찰, 헌병, 군대의 시위 탄압 과정에서 8명이 순국하고, 16명이 다쳤으며, 170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김 연구원은 “헌병이나 경찰 말단 경찰관서는 단독으로 수천 명의 시위대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들이 군대와 협력해 만세운동을 탄압한 경우가 많았다”고 분석했다.

일제는 조선 주둔 일본군을 3월 중순부터 분산 배치해 병력 파견 지역을 넓혔지만 3·1운동은 더욱 불타올랐다. 일제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보고 4월 5일 보병 6개 대대를 한국에 증파하기도 했다. 이들의 배치는 4월 22일 완료됐다.

일본군의 탄압 실태를 분석한 김상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원은 조선 주둔 일본군이 초반에는 주로 각 지역에 파견돼 경계를 하며 ‘위력 시위’를 벌였고, 후반기 본격적으로 강경 탄압에 앞장섰다고 봤다. 김 연구원은 국편DB를 활용해 군대에 의한 사상자 수가 일제 보고문서(470명)보다 훨씬 많다(1057명)는 걸 밝히기도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운동#국사편찬위#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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