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되지 않는 막다른 골목, 질겅질겅 씹는 ‘무(無)맛’의 절편, 을지로3가의 노가리. 누군가에겐 낡은 모습이지만,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59)에겐 서울만의 매력적 풍경이다. 이 교수는 훌륭한 술인 막걸리를 양은 잔에 담기 아까워 이 빠진 백자 사발을 갖고 다니고, “스타벅스에서 디저트로 절편을 팔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서울을 그림과 글로 담은 ‘서울 꼴라쥬’(디자인하우스·1만5800원)를 최근 발간했다.
서울 종로구의 작업실에서 19일 만난 이 교수는 허름한 서울을 예뻐하는 것 같다고 묻자 “실제로 예쁘기 때문”이라고 했다.
“파리, 뉴욕, 도쿄 등 도시는 모두 개성이 있어요. 서울만의 색과 감각이 있는데 이것을 흠이라 하면 밉지만 멋있다 보면 그 자체로 매력이 될 수 있죠.”
‘씨엘 아빠’로도 잘 알려진 그가 서울을 다루게 된 건, 7년 전 집필한 ‘꼴라쥬 파리’를 본 편집자의 제안 때문이었다. ‘꼴라쥬 파리’는 공동 연구로 자주 방문한 파리의 소소한 매력을 담았다. 이 교수는 제안을 받고 “서울은 당연히 써야 한다”고 흔쾌히 응했단다.
“서울의 풍경엔 시간의 축적, 응집, 지혜 모든 게 녹아 있어요. 식당의 사소한 그릇에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죠. 저는 이런 것들이 시간이 만든 추상화라고 생각해요.”
을지로3가의 노가리는 ‘탱고’라 표현할 정도로 애정이 깊다. 최근 논란이 된 을지로 재개발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냈다.
“프랑스에도 낡은 집이 많은데, 그들은 어떻게 고칠까를 생각하거든요. 어차피 10년에 한 번은 고쳐야 하니 그것도 산업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깡그리 없애고 새로 지을 생각만 해 안타까워요. 그 자리에 빌딩이 놓이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런 그의 작업실도 200년 된 한옥을 개조한 공간이다. 작업실에는 그가 모은 오래된 빗자루, 주둥이가 깨진 기름병, 플라스틱으로 만든 알록달록한 수저통 등이 쌓여 있었다.
무작정 해외로 떠나보고, 동화책도 내며 ‘일단 해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딸 ‘씨엘’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고 하자 이 교수는 “함께 성장한 것”이라고 했다.
“채린이(씨엘)가 데뷔하기 전부터 함께 ‘퀸’을 듣고 동화책을 그렸어요. 그 모든 게 함께 만든 세계인데 이제 책을 내면 ‘또 냈어? 어 그래’ 이래요. 아마 안 읽는 것 같아요.”(웃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