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유관순이라는 윤형숙 열사를 아는가? 그녀가 수피아여고를 다니던 1919년 3월 10일, 광주시내로 나가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이 총을 쏘자 군중이 이리저리 흩어지는데도 끝까지 앞장서서 저항했다. 그러자 헌병이 군도로 태극기를 들고 있는 그녀의 왼팔을 쳐 버렸다. 그런데 윤형숙은 떨어진 자기 팔을 줍는 게 아니라 오른손으로 피 묻은 태극기를 들고 다시 일어나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결국 그녀는 감옥으로 끌려가서 온갖 고문을 당하다 오른쪽 눈을 실명한다. 그러나 끝까지 일본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그때 당시 여성들의 삶은 집에서 빨래나 하고 허드렛일이나 하는 삶이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철없고 나약한 어린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3·1운동에 앞장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이 볼 때 일제의 만행이 너무 잔인하고 반민주주의적, 반휴머니즘적, 반근대적이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들이 외적으로는 정교(政敎) 분리 원칙을 지키면서도 자신의 신앙 양심과 소신을 가지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 박애, 인권, 민주주의를 가르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미션스쿨과 교회야말로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이루게 한 산실이었고 진원지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의 정신과 목표는 무엇인가? 3·1운동의 정신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세우는 것이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인류공영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3·1운동 전에는 국가의 개념이 대한제국이라는 틀로 고정돼 있었다. 왕의 결정과 말 한마디로 나라가 움직일 때였다. 그러나 3·1운동 이후에는 국민이 주인이 되고 민의가 통치하는 나라의 개념이 형성됐다. 그래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3·1운동을 앞두고 기독교계는 독립운동에 참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그때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하고 정무적 감각이 있었던 남강 이승훈 장로 같은 경우는 당연히 3·1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길선주 목사님을 비롯해 대부분의 목사와 장로들은 3·1운동에 앞장서는 것이 정치적 행보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서는 것을 꺼렸다.
그때 이승훈 장로는 1919년 2월 10일부터 28일까지 19일 동안 서울과 평양을 24차례나 오가며 회합을 가졌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가장 존경을 받고 영향력이 있었던 길선주 목사님께 가서 간곡하게 설득했다. “목사님, 나라를 찾지 못한 교회와 천당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라를 찾고 백성의 주권을 찾으면서 복음도 전하고 천당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연하의 목사들에게는 막말을 하면서까지 설득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감리교 신석구 목사 같은 경우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타 종교와 함께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지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이런 감동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4000년 동안 전해 내려 온 강토를 빼앗겼는데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더냐.” 그래서 신석구 목사님이 33인 가운데 제일 늦깎이로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때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까지 가게 됐다. 그러자 선교사들이 더 감동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매퀸과 찰스 클라크 선교사는 청년들이 3·1운동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은근하게 동조하고 격려해 주었다. 새무엘 모펫 선교사와 모리 선교사는 아예 3·1운동 집회에 참여했다가 감옥에 갔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파고다공원에서 만세를 외치는 사진을 비롯해서 제암리 사건 사진 등을 직접 찍어 외신기자회견을 열어 세계에 알렸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미국에 있는 가족, 친지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래서 장롱의 고서로 묻힐뻔 했던 3·1운동 사건이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필자 역시 필라델피아의 장로교 선교 역사박물관에 가서 그런 편지들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음을 확인했다.
교단이 연합해 참여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기독교가 전래된 지 얼마 안 돼 제도적인 종교로서 자리매김을 하지 못했고 시일이 워낙 급하다 보니까 뜻이 맞는 사람끼리 미션스쿨과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던 것이다.
물론 3·1운동은 기독교뿐 아니라 천도교도 많이 참여했다. 당시는 천도교인이 300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최대의 민족종교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3·1운동은 종교인들이 주도하고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쯤 돼서 종교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가 후진국일 때는 군사적 힘이 있는 자가 지배하고 민주화가 되면 법치와 정의를 세워간다. 그러다가 더 선진국이 되면 질서가 이끌어간다. 즉, 윤리, 도덕, 종교와 같은 정신세계가 이끌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법보다는 윤리, 도덕, 종교가 지배하는 때가 와야 한다.
그러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첫째, 발굴되지 않은 독립운동의 기록을 드러내야 한다. 요즘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는 것을 본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는 이벤트보다 통시적 행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독립운동 역사의 자취와 기록을 드러내 미완의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둘째, 국민통합에 앞장서야 한다. 먼저 사회의 내부 갈등을 치유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도 종교는 정파적이어서는 안 된다. 국민을 위해서 정부하는 일을 도울지언정, 종교가 정파적으로 가는 것은 비극이다.
셋째, 한반도의 평화를 이뤄야 한다. 남북이 서로 싸우지 말고 평화의 장을 마련하자는데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남북이 자유, 평등, 평화의 길로 갈 때 언젠가 통일이 되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 인류공영의 기치를 내건 3·1운동 정신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이제 미완의 3·1운동, 그 완성을 한국교회가 앞장서자. 100년 전, 애국지사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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