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퇴’ 관행 줄고 있지만 女무용수로서의 시간 길지 않아
파트너와 결혼은 장점도 많아”
“출산 뒤에도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요? 이전보다 수백 배의 노력이 필요하겠죠. 발레리나로 무대에 오르면서 결혼과 출산은 결코 쉽게 엄두를 낼 수 없었어요.”
미국 현대무용의 대가 ‘마사 그레이엄’은 무용수가 무대에서 내려오는 일을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표현했다. 몸을 쓰는 무용의 특성상 그 죽음은 다른 장르에 비해 일찍 찾아온다. 발레리나도 마찬가지다.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지난달 22일 만난 황혜민(41), 강미선(36), 김유선(33)은 “결혼, 출산은 모든 발레리나의 공통적 고민인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황혜민은 2017년 은퇴 후 현재 출산을 준비 중이며, 강미선은 결혼 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김유선은 올해 7월 일반인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결혼이 마냥 반갑기만 한 건 아니다. 결혼 후 집안일 등으로 이전처럼 연습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몸이 무거워지고 처지는 느낌’을 받는 건 한순간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들은 발레 외에도 필라테스, 자이로토닉 등 운동에도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강미선은 “허리 꺾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던 저도 결혼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꺾는 각도가 이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근유연성 운동을 끊임없이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결혼=은퇴’가 관행이었던 발레계에는 현역 활동 중 결혼하는 발레리나가 점차 늘고 있다. 그럼에도 출산은 여전히 은퇴 이후의 고려 대상이다. 앞서 최태지 임성남 김순정 임혜경 박선희 발레리나가 출산 후 무대에 오른 적도 있지만 손에 꼽을 정도다. 이들은 “출산 후에는 골반을 비롯해 체형이 바뀌어 점프력이 낮아지고 다리를 길게 뻗는 동작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일반인이 알아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발레리나들 사이에선 “동작이 이전과 달라진 것 같다”며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모유 수유도 체형 변화 때문에 사실상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황혜민은 “먼저 출산을 경험한 선배들이 피눈물이 날 정도로 노력했다는 얘기를 듣고 쉽게 용기를 내진 못했다”고 밝혔다. 강미선과 김유선은 “아이를 낳고 나면 체력은 물론이고 몸의 선이 좋지 않게 변할까 걱정된다”고 했다.
평생 발레와 무대만을 바라보며 “은퇴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던 그들. 개인차가 있지만 대부분 결혼, 출산 시점과 맞물려 30대 후반부터 마흔 살 전후로 은퇴를 고려한다. 해외 발레단에는 정년을 정해 놓거나 ‘종신 무용수’를 두는 곳도 있다. 이들은 “여자 무용수로서 춤을 출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음을 알기에 매번 눈물 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은퇴 후 울적한 마음에 한동안 발레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던 황혜민은 “여자 후배들에게 ‘결혼, 출산을 먼저 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도 하지만 저 역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대 위 매 순간이 소중해 지금과 동일한 선택을 했을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발레리나에게 결혼은 힘들기만 한 걸까.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하던 이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함께 호흡을 맞추던 파트너와 결혼한 황혜민, 강미선은 걱정했던 것보단 장점이 많다고 했다.
“저와 파트너가 함께 돋보일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게 됐죠. 같은 동작을 해도 더 힘차게 점프하며 서로를 끌어줬어요. 감정 연기는 훨씬 수월해졌고요.”(강미선)
“발레단에서 일상을 함께하고, 연습이 끝난 뒤에도 편하게 작품 얘기를 주고받으니 시너지가 생겼어요.”(황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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