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은 2017년 테이트브리튼에서 열려 관객 50만 명이 찾은 호크니의 회고전을 기획했다. 이번 전시는 “호크니가 3차원을 평면에 담는 방식을 탐구한 60년간의 여정”이라고 했다. 초기 작품에서 돋보이는 건 다양한 미술사 전통의 활용이다. 전시장 초입에서 볼 수 있는 ‘첫 번째 결혼’(1962년)은 고대 이집트 회화의 구도를 반영했다. 호크니가 런던이 아닌 잉글랜드 북부에서 보수적 교육을 받은 영향이다. 그는 런던 왕립예술학교로 오고 나서야 추상예술 등 진보적 시각 언어를 경험했다.
“호크니는 이후에도 르네상스와 프랜시스 베이컨, 추상과 구상 등 여러 미술사적 전통을 자유자재로 혼합해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었습니다.”
○ 피카소 앞 벌거벗은 호크니
“피카소와 마티스는 세상을 흥미롭게 보이도록 만든 반면, 사진은 오히려 따분하게 보이게끔 만든다.”(호크니, ‘다시, 그림이다’, 디자인 하우스)
2층 전시장의 ‘블루 기타’ 섹션은 피카소를 향한 호크니의 사랑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판화 ‘아티스트와 모델’에서 호크니는 피카소 앞에 벌거벗은 채 앉아 있다. 리틀은 “마치 선생님에게 겸허한 자세로 그림을 검사받는 듯한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 개념에 지친 대중 매혹하는 ‘신표현주의’
‘더 큰 그랜드캐니언’(1998년). ⓒPhoto Credit: Richard Schmidt, ollection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Canberra1960년대 호크니 작품은 ‘팝아트’로 분류된다. 하지만 리틀은 “당시 호크니는 팝아트 호칭을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미술계는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등 난해한 작품이 주류였는데, 호크니는 늘 구체적 형상의 표현에 집중해 예술계의 ‘변방’ 작가였다. 그러다 198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신표현주의’ 회화가 주목을 받으면서 호크니의 작품도 재조명을 받았다.
“호크니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가장 단순히 표현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가 한순간에 대중의 눈을 사로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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