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만을 담을 것 같지만 교묘하게 폭력을 숨겨놓기도 한다. 그림 형제나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무꾼과 선녀’ 같은 한국 전래동화도 그렇다.
나무꾼과 선녀는 이런 이야기다. 가난한 나무꾼이 사냥꾼한테 쫓기던 사슴을 나무 더미 뒤에 숨겨줘 목숨을 구해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슴은 나무꾼의 소원을 들어준다. 나무꾼은 사슴의 말에 따라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고 그녀를 아내로 삼는다.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든 나무꾼의 입장에서 보면 소원을 성취하는 행복한 이야기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결혼해야 하는 선녀의 입장에서 보면 폭력의 이야기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폭력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선녀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을 우리 문화가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기 때문이다.
나무꾼과 선녀라는 제목도 나무꾼을 앞에 놓음으로써 억압에 일조한다. 나무꾼을 중심으로 모든 게 합리화된다. 그렇다면 제목을 ‘선녀와 나무꾼’으로 바꾸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선녀가 이야기의 주체로 되면서, 선녀가 목욕하는 장면을 엿보고 날개옷을 훔치고 속임수로 결혼하는 사냥꾼의 행동은 관음증이요 폭력이 된다. 선녀를 붙잡을 비밀을 알려주는 사슴도 그 폭력에 동조한다. 아니, 사슴은 단순한 동조자라기보다 폭력을 처방하고 부추기는 주체이거나 적어도 가부장 문화의 대리인이다.
그러나 이렇게 읽을 수 있으려면 제목만 바뀔 게 아니라 내용도 바뀌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20여 종의 나무꾼과 선녀, 선녀와 나무꾼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제목만 앞뒤로 바꾸고 내용을 그대로 두는 것은 구호만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구호는 구호일 따름이다. 진짜 변화는 나무꾼과 선녀, 선녀와 나무꾼이 기반으로 하는 문화가 거북이걸음일망정 조금씩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라야 가능하다. 문화 속의 폭력을 응시하고 사유하는 게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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