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광복) 후 남북 분단의 위기를 맞은 정치권과 사회 지도층은 유관순 열사를 통해 민족의 일체감을 형성하려 했다.”
2일 충남 천안시 백석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3·1운동 100년 그리고 세계평화’ 국제 심포지엄 이틀째, 조한필 백석대 교수는 ‘유관순, 어떻게 발굴됐나’라는 주제 발표에서 “유 열사 선양 작업을 친일과 우익, 기독교의 합작 프로젝트로 보려는 시각이 일부 있는데 이는 다소 무리”라며 이같이 밝혔다. 유 열사가 민족 정체성 확립과 통합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토론자로 나온 천안 향토사연구가 임명순 씨는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을 조직해 남녀 평등선거와 임금차별 철폐, 여성 자주경제생활권 확립 등을 주장한 여성들은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유 열사 이미지를 부각하며 여성 후보를 대거 입후보시켰다”며 여성들이 스스로 유 열사를 선양했다는 의견을 폈다.
이날 토론에서는 동아일보가 광복 후 유 열사의 업적을 찾아내 알리는 데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발표도 이어졌다.
조 교수는 “1936년 편집국장으로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한 설의식 씨가 정인보 최현배 장지영 등과 함께 1947년 유관순기념사업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며 “그가 쓴 추도문은 1953년 교과서 ‘중등최신작문’에 실려 학생들이 유 열사를 기리도록 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설 씨는 유 열사에 대한 최초의 영화 ‘유관순’을 윤봉춘 감독이 제작할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고 알려져 있다”고 덧붙였다.
임 연구가는 소설가 박화성이 지은 유 열사의 전기 ‘타오르는 별’과 기자 출신 최은희 씨의 회고록 ‘조국을 찾기까지’에 나오는 유 열사와 동아일보의 인연도 설명했다. 임 연구가는 유 열사의 생년월일과 순국일, 당시 공주지방법원 판결 형량 등을 바로잡았으며 유 열사가 항소를 포기한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내기도 했다.
임 연구가는 유 열사를 다룬 최근 영화들이 당시 상황을 다소 모호한 기준으로 취사선택하고 있다며 “유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간호당번을 하면서 (3·1만세운동으로 투옥돼) 볼거리를 앓던 독립유공자 이아주를 돌봐주고 병환의 위중함을 알려 가석방되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아주는 이후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 선생과 결혼했고 사후인 2005년 3·1운동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안영배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종합토론에서 “동아일보가 유 열사에 대해 집중 보도한 것은 유관순 영화에 자금을 지원하고 유관순기념사업회 위원장을 맡은 유홍 씨(1946년 이승만과 김구의 단체가 통합해 만든 반탁운동기구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재정부장)가 인촌을 멘토로 여긴 데다 이아주와 유 열사가 어려운 환경에서 만나 좋은 인연을 맺었던 것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안 위원은 1947년 11월 27일 천안시 병천면에 기미독립운동기념비를 제막한 날의 동아일보 특집기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천고에 빛날 순국혼, 유관순 소녀의 위훈’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오늘의 자유와 광복을 가져오게 한 수많은 영령 가운데 16세의 처녀로서 4000명의 선두에서 만세를 불러 … 3000만 겨레의 가슴에 감격과 광명을 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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