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이 흘러넘친다. 핵 폐기를 논의하는 지도자들 테이블 위에, 성폭력을 둘러싼 권력자나 연예인 증언 속에, 주변인 처신을 질타하는 게시물에도. 개인 매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를 맞아 거짓말은 수량으로나, 정교함으로나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 보인다. 최강국 지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도 어제오늘이 아니라 금세기 초반 이라크전부터 낯설지 않다.
이 책은 거짓 뉴스를 분별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거짓말의 폐해를 질타하는 것도 목적이 아니다. 저자는 ‘거짓말’을 철학적,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그 개념의 뼈대가 하얗게 드러날 때까지 파헤친다. “거짓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가려볼 줄 알 때만 논의가 엉뚱한 곳에서 헤매거나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말이란 인식론적으로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자.
세상에는 (단일한) 진실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거짓말은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는지와 관계가 없다. 사람은 단지 ‘자기가 진실로 여기는 것’을 숨기려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짓말은 놀랍게도 자유를 전제로 한다. 자신이 체험하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표상할 수 있기에 거짓말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실제 아는 모습과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를 전제하지만 거짓말은 타인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자기 생각을 타인의 생각 자리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상대의 행동을 바꾸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핵심은 ‘거짓말 발화자(發話者)와 수신자의 관계’에 있다. 거짓말은 권력이며, 권력은 동의를 필요로 한다. 거짓말의 수신자가 거짓말하는 사람과 함께 거짓 세상을 지어낼 때 거짓말은 유효해진다. “자유가 있는 인간들이 함께 이뤄내는 작업이 거짓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발화자만 들여다본다고 거짓말의 정체가 들여다보일 리 없다.
한편 거짓말쟁이를 높은 가치에 놓으려는 논변들이 있었다. ‘거짓말은 진실을 갖고 노는 창의성의 표현’이라는 관점이다. 저자는 이런 얘기들이 궤변임을 꿰뚫는다. 거짓말쟁이는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금의 허위를 섞을 뿐, 가짜 이정표만 세워둘 뿐이다. 예술작품처럼 세계를 새롭게 지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인식론적 관점에서 해부한다고 해서 윤리적 관점을 외면했다는 뜻은 아니다. 독일의 나치 청산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해나 아렌트가 제기한 ‘악의 평범성’ 개념이 2010년대에 논박됐다”는 뉴스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이 저자의 2011년 역저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다. ‘악이란 결코 진부하거나 평범하지 않으며 고도의 계산으로 이뤄지는 행위’란 점을 논증한 것이다.
그런 만큼, 윤리적 관점을 제쳐 두고 거짓말의 인식론적 정수를 헤집은 저자의 시각은 오히려 무거운 윤리적 각성을 요구한다. 거짓을 넘어 ‘인류로서의 신뢰’에 대한 호소다.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에서 저자는 판문점 회담장에 들어가본 경험을 떠올린다. “우리(독일)가 분단 시절 이와 견줄 만한 신호를 세계에 보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언제라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소여야 한다는, 언제라도 안전한 만남이 보장되어 신뢰를 키우려는 목적 외에는 쓰이지 않아야 한다는 신호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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