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색한 금빛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밝은 톤의 캐주얼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바로 옆에 놓인 테니스 라켓이 아니었다면 한국 테니스의 간판인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10일 서울 강남구 태그호이어 청담 전시장에서 정현(23)을 만났다. 올해부터 스위스 시계 브랜드 태그호이어의 공식 홍보대사 활동을 시작했다. 태그호이어 글로벌 본사에서 한국인을 브랜드 홍보대사로 낙점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현이 홍보대사 제안을 수락한 건 ‘어려움에 굴복하지 마라’는 태그호이어의 슬로건 영향이 컸다. 그는 “성격상 웬만하면 포기를 잘 안 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땐 더욱 그렇다”면서 “태그호이어 슬로건을 보면서 내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제 막 시계에 입문한 그는 요즘 운동할 때를 빼곤 항상 시계를 찰 정도로 시계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고도 했다.
허리 부상으로 지난달부터 국내에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그는 ‘아픈 사람’이라고 하기엔 무척 밝은 모습이었다. 얼마 못 가 관두긴 했지만 짬을 내 댄스학원도 다녔다고 했다. 1년 내 이어지는 월드투어 일정 때문에 소홀했던 동네 친구들과의 만남도 챙기고 있다. 월드스타보다는 평범한 20대 대학생 같았다. 요즘 그는 몸과 마음을 동시에 ‘재활’하고 있었다.
‘정현’ 하면 물집이 터져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발바닥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세계 최정상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로저 페더러를 상대로 부상 투혼을 펼친 그의 모습은 전 세계 테니스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에게 호주 오픈은 ‘힘든 경기’인 동시에 ‘행복한 경기’였다. 정현은 “조코비치, 페더러 같은 거물급을 상대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고 말했다. 통증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경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기권했지만 정현은 ‘후회나 아쉬움은 없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좋지 않은 몸 상태로 경기를 이어가는 건 관중과 상대 선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면서 “팬들을 위해 경기에 나섰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다고 판단해 기권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상으로 경기에 잇따라 출전하지 못해 정현은 최근 글로벌 랭킹 순위가 100위권까지 밀려났다. 그는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을 ‘슬럼프’가 아닌 ‘성장의 과정’으로 표현했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가장 마음이 편합니다. 내려올 때까지 내려왔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죠. 여러모로 힘들지만 이것을 이겨내야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국민들의 응원 덕에 이곳까지 왔다”면서 “좋은 모습으로 돌아갈 테니 그때도 예전처럼 많이 응원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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