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국립중앙박물관의 ‘대고려전’에 전시된 유물들은 100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멋지고 훌륭했다. 전시관의 끄트머리에 고려시대 다실을 재현했는데 청자로 만든 찻잔과 다구들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손잡이 끝에 거품기가 달린 은제 차시(찻숟가락)는 고려인들이 가루차를 거품 내어 마셨다는 증거다.
찻잎이 가진 떫고 쓴 맛을 즐긴다면 말차(抹茶)다. 찻잎을 쪄서 말린 후 미세하게 분쇄한 가루 형태로 만든 후 소량의 물을 붓고 거품을 내어 마시므로 찻잎 자체를 먹는 셈이다. 최근 들어 카페의 메뉴에 말차를 베이스로 한 음료가 늘어나는 추세다. 그중 거품 낸 우유를 혼합한 말차 카푸치노가 특히 인기다. 고려인이 마시던 말차가 1000년이 지나서 다시 인기를 얻고 있으니 역시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잎차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온 우리와 달리 일본은 말차와 잎차 모두를 음용해 왔다. 일본의 최상급 잎차, 옥로(玉露)를 만들기 위해 4월 하순경 햇볕을 차단하는 차광막을 설치한다. 찻잎의 떫고 쓴 맛을 내는 카테킨은 억제되고 아미노산이 늘어나 감칠맛이 강해진다. 16세기부터 이어져온 독특한 제법에 의해 옥로는 일본에서 고급 녹차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실제로 처음 우려낸 옥로는 마치 생미역이나 다시마 같은 해조류의 감칠맛이 난다. 양력 4월 20일경, 절기상 곡식을 풍성하게 하는 비가 내린다는 곡우(穀雨)다. 국내에선 곡우 직전에 딴 어린잎으로 제조한 것은 우전차, 곡우에 딴 찻잎으로 만든 차는 곡우차라 하여 절기상으로 구분한다.
넓은 토양을 가진 중국은 수천 년에 걸쳐 생활 속의 차 문화를 이룬 차의 종주국이다. 덖거나 쪄서 말리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녹차와 달리 훨씬 복잡한 과정을 통해 찻잎을 다종다양화시켰다. 백차(白茶)는 덖거나 비비지 않고 어린잎을 그대로 건조한 차로 찻물이 담황색이다. 대표적인 백차로는 백호은침(白毫銀針)이 있다. 찻잎이 까마귀처럼 검고 용처럼 구부러져 있는 오룡차(烏龍茶)는 대표적인 청차(靑茶)로서 덖기 전에 찻잎을 흔들어 열을 발산시키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특징이다. 덖고 비빈 찻잎을 물 뿌려 쌓아 놓고 발효시킨 후 덩어리를 만들어 다시 건조하는 것이 흑차(黑茶)다. 길고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만큼, 가장 고가이면서 와인처럼 빈티지를 인정받는 보이차(普洱茶)가 대표적이다.
아직 국산차가 차지하는 비율이 미미함은 아쉽지만, 커피가 지배적인 우리의 음료 시장에서 차 음료가 늘어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차는 분위기가 반이다.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마셔야 차 맛도 좋다. 봄은 차가 어울리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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