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고난 속에 빛나는 정직과 사랑의 가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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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로물루스, 나의 아버지/레이먼드 게이타 지음·변진경 옮김/219쪽·1만4000원·돌베개

호주의 광대한 평원이 펼쳐지는 에릭 바나 주연의 2007년 영화 ‘로물루스, 나의 아버지’. ⓒFootprint Flims
호주의 광대한 평원이 펼쳐지는 에릭 바나 주연의 2007년 영화 ‘로물루스, 나의 아버지’. ⓒFootprint Flims
가정의 달에 나온 이 책은 한 소년의 성장기이기도 하고, 성장한 소년이 아버지에 대해 쓴 평전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호주 시골로 이민 온 주인공의 가족,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가 된 단치우 형제. 어른 주인공 넷 중 세 사람은 불륜과 배신으로 괴로워하고, 두 사람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두 사람은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결정으로 치닫는다. 여기까지 보면 광막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더없이 잔혹한 이야기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이 책이 펼쳐내는 드라마의 겉모습일 뿐이다. 이민 노동자로 사회의 하층에 있지만 정신의 존엄을 잃지 않는 꿋꿋한 사람들이 있고, 포기하지 않는 헌신과 애정이 있으며, 훗날 철학자로 자라나는 저자의 인간에 대한 통찰이 있다. 책장을 덮은 뒤에는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의 윤곽을 뚜렷이 그려내는 빛, 여름 풀잎과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색을 띤 흙길, 죽은 한 그루 레드검 나무’로 표상되는 호주 평원의 풍경이 한동안 눈앞에 어른거린다.

루마니아계 유고인으로 독일에 징용된 저자의 아버지 로물루스. 독일 소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전후 유럽의 피폐와 아내의 천식을 피하고자 바다를 건넌다. 고향 친구를 찾다가 단치우 형제와 밀접한 사이가 된다. 얼마 뒤 아내는 우울증에 빠지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치닫기 시작하는데….

이 집안의 아이가 보낸 유년기가 순탄하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목숨을 끊었을 것으로 여긴 어머니의 시신을 찾으러 마을 사람들과 함께 늪을 헤매고, (피는 흘리지만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어머니는 돌아온다) 배신한 사람을 쏘겠다며 총을 멘 아버지와 새벽길을 동행하고, 착란에 빠져 헛것을 보는 어른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그래도 저자가 기억하는 그 시절에는 인간과, 심지어 동물의 체온까지 넘쳐난다. 집안의 질서를 꿰고 있는 꾀쟁이 앵무새 잭, 그리고 개와 고양이들이 있고, 주말 오후 티타임에 초대해 준 노부인 자매와 그밖의 푸근한 이웃들이 있었다. 책벌레였던 호라 아저씨는 슈바이처와 의학자 제멜바이스, 철학자 러셀의 고귀한 이상을 이 소년에게 각인해 준다.

1946년 독일에서 호주로 떠나기 직전의 로물루스 게이타(왼쪽 사진)와 10년 뒤 열 살 무렵의 아들 레이먼드. ⓒRaimond Gaita
1946년 독일에서 호주로 떠나기 직전의 로물루스 게이타(왼쪽 사진)와 10년 뒤 열 살 무렵의 아들 레이먼드. ⓒRaimond Gaita
아내의 부정과 정신질환에 시달렸던 아버지야말로 이 소년에게 인간에 대한 통찰을 전해 준 가장 강력한 존재였다. 그는 정직함만이 인간의 강인함을 만든다고 굳게 믿었다. ‘정직은 득이 된다’는 이해타산적인 정의를 경멸하고, 서로의 가치를 이해하는 고결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갈망했다. 그 아버지를 포함해 이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모두 삶의 풍파에 휘청거렸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그들은 불행의 희생자였고 낙담도 했지만 결코 불행이 그들을 위축시키지는 못했다.”

책을 읽으며 ‘개 같은 내 인생’ ‘길버트 그레이프’ 같은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영화를 떠올렸다. 주인공 각자 어리석음과 약점이 있지만 따뜻함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읽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책은 2007년 에릭 바나가 주연한 리처드 록스버러 감독의 ‘로물루스, 나의 아버지’로 영화화됐다.

원서는 ‘Romulus, My Father’라는 제목으로 1998년 출간돼 그해 호주 언론이 선정한 ‘올해의 책’을 휩쓸었다. 우리말 제목은 저자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읽은 추도사에서 책이 시작된 점에 착안한 것이다. 저자는 멜버른대 인문학부 교수이자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의 명예교수이며 영어권 도덕철학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작별#로물루스 나의 아버지#레이먼드 게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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