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인 4일 서울 서초구 반포본동 한신상가 지하에 있는 이상국탁구교실. 연신 공을 때리는 정병일 ㈜베코인터내쇼날 대표이사(59)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평생 운동을 해본 적이 없던 정 대표에게 탁구는 어느 순간 인생 최고의 취미이자 건강 유지 수단이 됐다.
“2016년 8월이었다. 아내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끌며 어디 좀 가자고 했다. 가보니 탁구장이었다. 그해 6월 암 수술을 받았다. 내 상태를 보고 아내가 이래선 안 되겠다 생각했나보다. 브리지게임을 하는 아내가 여기저기 물어보니 탁구가 짧은 순간 운동량도 많아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들었다고 했다.”
정 대표는 희귀 난치성 암인 염증성근섬유아세포종으로 복부 왼쪽 근육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정 씨는 2004년엔 담석 제거 수술을 받기도 했다. 아내가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했다. 어릴 때 친구들과 놀면서 탁구를 친 것 외에는 살면서 그 어떤 스포츠도 해본 적이 없다. 끌려는 갔지만 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내가 도망갈 줄 알고 아내가 탁구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앉아서 지켜봤다. 뭐 어쩔 수 없이 칠 수 밖에 없었다. 힘들었다. 운동을 안 했으니 당연했겠지만 정말 도망가고 싶었는데…. 아내가 지키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들은 우릴 불륜관계로 생각했단다. 남자가 탁구 치는데 꼬박꼬박 여자가 따라다녀서. 보통 남자나 여자나 혼자 다니는데 붙어 다니니….”
처음엔 채 5분도 버티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1시간30분에서 2시간은 쳐야 직성이 풀린단다. 탁구는 그의 삶을 바꿨다.
“1993년부터 직물을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엄청 힘들었다. 1년에 4개월 넘게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었다. 밤늦게 퇴근해 술집을 전전하며 모든 것을 토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거래처와 흥정하며 쌓인 울분과 감정의 찌꺼기를 다 토해내야 마음이 안정이 됐다. 그렇게 쏟아내고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꼼짝 않고 누워 있으면 몸이 껍질만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다시 털고 일어나 사업에 매진했다.”
이젠 탁구를 하면서 흘리는 땀방울에 그 울분을 실어서 날린다. 정 대표는 “땀을 흠뻑 흘리며 탁구를 치고 나면 나를 옥죈 온갖 스트레스도 빠져 나간다. 아내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 한다”며 활짝 웃었다.
“사실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과 컨설팅까지 받았다. 사업에 대한 신경이 너무 곤두서 있어서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했다. 의사가 당시 술로 푸는 방법, 약 복용, 운동법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업이 바빠 운동할 시간은 없었다. 의사는 술도 약의 일종이라고 했다. 하지만 술은 뇌가 파손된다며 약을 권했다. 그런데 난 술로 풀었으니….”
결국 탁구가 새 인생을 가져다 준 셈이다.
“탁구 초보자라 처음엔 주 2회 레슨을 받으며 적응해 나갔다. 초창기엔 30분 레슨 받으면 녹초가 됐다. 하루 치고 나면 다음날은 온 몸이 쑤셔서 힘들었다. 한 10개월 정도 꾸준히 탁구를 치니까 익숙해져 힘은 들지 않았다. 탁구로 게임을 하기 시작한 것은 1년 반 정도 지났을 때부터였다. 이젠 2시간 쳐도 그렇게 힘들지 않다. 주말엔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씩 게임을 하기도 한다. 이젠 운동을 안 하면 몸이 찌뿌드드해져 발길이 자연스럽게 탁구장으로 향한다.”
정 대표는 평일엔 오후 8시 이후, 토요일엔 오후 2시에 탁구장에서 공을 치며 스트레스를 날린다. 탁구를 치면서 담배도 끊었다.
“암 수술 받고도 계속 담배를 피웠는데 탁구장에서 만난 지인이 ‘큰 수술을 했는데 담배도 못 끊느냐’고 놀리기에 내기를 걸었다. 난 뱉은 말은 지키려고 노력한다. 바로 담배를 끊어 버렸다. 친구들이 담배 끊은 뒤 100일 기념 파티도 해줬다. 그 친구에게 고맙다.”
에어컨바람만 맞아도 재채기가 나오는 콜드 알레르기와 피부 알레르기도 탁구를 치면서 사라졌다. 정 대표는 “아침에 아랫배에 통증이 오는 장 경련도 어느 순간 없어졌다. 탁구 하나로 내 인생이 바뀌었다”며 웃었다.
정 대표는 탁구를 통해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난 고교 친구 모임 외에 가본 적이 없었다. 낯을 좀 가리는 편이다. 솔직히 내 성격이 4차원을 넘어 8차원이다. 그런데 탁구 치며 만난 사람들이 다 좋았다. 그래서 잘 어울려 지내고 있다.”
정 대표는 탁구 게임에 지나치게 승부욕을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
“즐겁게 쳐야할 탁구에 왜 목숨을 거나. 탁구 게임에서 이기는 것도 좋지만 즐겁게 재밌게 치는 게 더 중요하다. 난 탁구 게임에 지나치게 승부욕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살지 마라’고 놀린다. 진짜 목숨 걸고 해야 할 인생의 일이 얼마나 많은데…. 탁구에서까지 그러면 인생 무슨 맛으로 사나.”
정 대표에게 탁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건강을 지켜주는 훌륭한 동반자이자 삶의 가치를 더해주는 취미이다.
“난 행복한 사람이다. 운동 따로 취미 따로 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건강에 좋다고 운동이 다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건강만 생각하고 운동하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일 수 있다. 즐겁게 보내는 취미이기도 하기에 탁구 치는 시간이 더 의미가 있다.”
이상국탁구교실을 운영하는 이상국 전 한국탁구국가대표팀 감독(69)은 “탁구는 바쁜 현대인들이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고 말했다.
이 전 감독은 “좁은 공간에서 다양한 운동량에 맞게 탁구를 칠 수 있다. 젊은 사람들에겐 움직임을 많게, 나이 든 분들에게는 적은 움직임으로도 활동량을 높여주는 등 남녀노소가 다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든 칠 수 있는 ‘전천후 스포츠’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5분만 랠리를 해도 온 몸에 땀이 흐른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탁구를 통해 몸과 정신 건강도 챙기고 동호회 사람들과 ‘즐겁고 건강한 교류’도 하고 있는 오늘이 너무 행복하단다.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탁구를 치겠다.” 탁구로 바뀐 그의 인생에 활력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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